추사 김정희가 유배를 떠날 때 해남의 대흥사에 들렀다. 대흥사에는 친한 벗인 초의선사가 주지로 있었다. 추사는 벗에게 대흥사에 걸린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을 쳐다보면서 벗에게 "대체 그대는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글씨를 걸어놓았는가?" 하고 타박했다. 그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다. 그리고는 그 현판을 내리게 한 뒤 자신이 새롭게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을 걸게 했다. 그리고 제주에서 9년의 유배생활을 지낸 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대흥사를 들렀다. 초의선사가 유배생활을 하던 추사를 여러 번 찾아와 주었으므로 인사도 할 겸 들렀다. 그리고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가리키며 벗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보게, 이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제주에서 유배되어 있던 그 9년 동안 추사는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바람 많고 외로운 제주의 섬에서 추사는 자신의 글씨인 추사체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는 품의 넓이까지 키운 셈이었다. 하여 서여기인(書如其人) 곧 '글씨는 그 사람과 같다'고 말하지 않던가. 서예가들이 금과옥조로 삼는다는 이 말의 의미처럼 서예란 단순히 겉으로 보기에 좋은 글씨를 쓰는 기술이나 기교일 리가 없다. 즉 글씨에 나를 담는 일이란 글씨로써 나를 다듬어가는 일이다. 그러니 '예(藝)'는 모름지기 글씨로써 인격을 수양하는 '예(禮)'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홍안(紅顔)의 호남아(好男兒)'로 기억되는 지산(智山) 정진용(1935~2010) 선생이 그런 서예가의 삶을 산 사람이다. 서예가로서는 드물게 선생은 경주고에서 영어를 가르친 교육자였다. 포항에서 태어나 동아대 법정대를 졸업한 선생은, 1972년경 향산(香山) 이정갑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붓과 먹을 가까이 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선생은 가장 원초적인 한자 형태인 전서(篆書)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해서에도 능했다. 그러나 선생은 일정한 서법에 얽매이지 않고 '지산체'라는 자신만의 서체를 구축하며 획의 강약을 자유자재로 펼치는 강인한 글씨를 이루었으니, 그야말로 선생의 성품과 인간미와도 궤를 함께하는 경지에 이른 셈이었다. 영어 교사에 어울릴 법한 서구적 외모와도 어울리게 묵직한 선과 친근하고 구수한 멋이 풍겨나는 글씨이다. 선생을 아는 이들은, 술자리에서 돌아온 선생이 커다란 벼루 가득 먹을 갈아 큰 붓에 흠뻑 먹인 뒤 그야말로 마음 가는대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고 자주 말했다. 선생은 한국미술대상전 특선과 동경국제미전 수작상, 신라문화대상, 신라서화대전 초대작가상 등을 수상했고, 한일, 한중 저명작가 초대전과 프랑스 살롱드파리(SALON DE PARIS) 국제초대전 등에 출품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 향산 선생의 뒤를 이어 경주서도학원을 운영하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다양한 전시회를 열면서 서예 인구를 확산하는 데도 기여했고, 한국서예협회 초대 경주지회장을 지냈다. 2004년 대구 매일신문 화랑에서 가졌던 '청소년 소녀 가장 돕기 개인전'은 예술가로써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회향하고자 한 그의 소박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 때 출품된 '자녀를 위한 기도문'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4군자를 주제로 한 문인화도 전시했는데 지산 특유의 문자향을 더욱 그윽하게 했다. 글씨 한 점이 우리에게 전하는 울림은 그 무엇보다 묵직하다. 연필이나 펜으로 쓰는 손 글씨조차 컴퓨터의 보급으로 익숙하지 않은 시절이고 보니 붓글씨는 일상에서 멀어진지 오래. 묵향으로 온기를 전하던 지산선생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더 없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