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미국에서 '거짓말의 발명'이라는 영화를 내놨다. 이 영화는 거짓말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남자가 점차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류가 거짓말을 하는 법을 터득하지 않은 사회'라는 전제를 깔고 만든 영화다. 세상에 거짓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투명하고 건전한 사회가 될 것인가라는 상상은 누구나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거짓말이 없는 사회에도 불편함은 존재한다는 역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거짓말의 반대어는 '정직'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정직'의 국어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이라고 나와 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정직하게 살아간다면 범죄가 대폭 줄어들고 온갖 부조리가 사라져 버릴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어린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상의 미덕이라고 배웠다. 그래야 사회에 인정받고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성장했다. 그러나 세상은 달랐다. 최순실 국정농단에 연류된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거기에는 권력가도 교육자도 기업인도 있다. 그들은 이 사회의 지도자들이고 모든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들을 속이고 엄청난 혼란을 가져오도록 했으며 국민들의 여론과 법의 심판을 받게 됐다. 청문회에서 보여준 그들의 거짓말은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청문회에서야 그랬다 치더라도 검찰과 법정에서도 끝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혐의를 부정했다고 하니 도대체 우리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지 암담할 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제 뭐라고 가르쳐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범죄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거짓말 탐지기다. 그러나 그것의 정확도는 믿을 수 없다. 범죄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참을 말하는지 기계가 판별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범죄자의 양심에 맡겨둘 수밖에 없다. 경찰이나 검찰은 범죄자의 진술을 토대로 죄의 유무를 판단한다. 그것도 경찰과 검사의 주관적 판단으로 재단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대통령과 최순실, 김기춘과 조윤선, 이재용과 여러 재벌들은 지금까지 끝까지 모른다, 아니다를 반복하고 있다. 엄청난 증거와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텨보겠다는 심산이다.  물론 그들의 이 같은 질긴 부정이 현재의 위기를 넘길 수는 있다하더라도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 끝까지 묻혀버리는 진실은 없다. 훗날 역사는 이들의 잘잘못을 낱낱이 밝혀내고 엄중하게 징치(懲治·징계하여 다스림) 할 것이다. 세계의 언론은 현재의 대한민국을 주목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성실하고 근면하며 정직하고 질서정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고위층들의 부정부패는 후진국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대한민국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버텨내는 것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저력인 것이다. 촛불집회에 1천만이 넘는 시민들이 몰렸어도 단 한 건의 불법 상황이나 불미스러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전 세계가 놀라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이처럼 성숙한 자세로도 세상을 바꾸지 못한 것은 어쩌면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을 수 있다. 정치를 보는 눈이 밝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뽑은 선출직들이 모두 우리 국민들을 대표할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이제는 살펴봐야 한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정부의 고위관직을 차지했고, 그 스펙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정치에 입문하기 위해 짧은 기간 신분세탁을 한다. 그것에 국민들은 맹목이 된다. 지역에서 유리한 정당만 업고 나오면 당선되는 구조가 개선되지 않고서는 이 거짓말이 횡행하는 불행한 사회는 지속된다. 고위직의 거짓말은 이제 사회적 신드롬이 되고 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어떤 일에 봉착했을 때 국민들은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장난스럽게 말한다. 위험하고 불행한 일이다. 이 상황이 오래 가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정직하지 않은 사회는 병든 사회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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