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이 발명되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가장 잘 생긴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자신의 외모를 비춰 볼 수 있는 광학적 (光學的) 거울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은 발명하지 못했다.  항상 반대편에 서서 보아야 자신의 모습이 비로소 보일 것인데, 사람들은 모두 자기 위치에서만 자기를 보려하니 온전한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당연하다. '소크라테스'가 순 우리 경상도 표준어로 '니 꼬라지를 알아라' 한 것은 바로 사람이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함을 꼬집은 말이다. 요즘 하도 세상이 어수선해서 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자신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위인들이 '구국의 결단'으로 나라를 구하겠다고 앞을 다투고 있다.  갑자기 티벳의 종교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말이 생각난다. "세상을 구하려 들지 마라. 그리고 세상을 바꿀 생각도 하지마라. 길이 험하다 하여 이 세상의 모든 길을 양탄자로 덮을 도리는 없다. 다만 자신이 튼튼한 신발로 고쳐 신으면 세상의 모든 길을 고친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별로 변변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주제도 모른 채, 타인을 바꾸려 하고 세상을 바꾸려 든다. 그러나 일찍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느님도,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도 이 세상의 모든 악(惡)을 일소(一掃)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중생(衆生)을 구제(救濟)하지 못했다. 당신들이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오염만 시키지 않았으면 세상이 이토록 혼탁(混濁)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세상 만유(萬有)가 다 본래 청정함이니, 모든 것을 다 제자리에 두고 모든 이가 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바꾸어야 할 것도, 달라져야 할 것도 없다. 인간의 수양(修養)과 공부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신의 참모습을 알기 위한 것이다. 자신을 타인이 보듯 하면 너무나 명료하게 자심(自心)이 보이지 않겠는가? 추한 자기 몰골을 보았거든 부끄러운 줄 알아 스스로 몸을 숨겨야지, 가면(假面) 뒤에 얼굴만 숨긴다고 대중(大衆)의 눈(目)을 피할 길은 없다. 천하 없는 법리(法理)와 궤변으로 과거를 미화해도 당신들이 해온 일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류독감으로 닭이 전멸해가는 닭의 해 벽두부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또 닭싸움을 시작하려나 보다. 그러나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이제 없을 것이다. 화장(化粧)한 여인에게 속는 남자는 있어도, 추하디 추한 민낯을 본 여인의 화장에 속을 남자는 없기 때문이다. 세상 구하기는 그만 두고, 자기를 먼저 구해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기꺼이 한 표를 던지겠다. 아무도 세상을 구할 사람은 없으며, 모두가 다 스스로 자신을 구하면 세상이 구해질 것이요, 스스로를 바꾸면 세상은 담박에라도 달라 질 것이다. '남의 눈에 든 티끌은 보면서도 자기 눈에 든 대들보를 보지 못한다' 한 성경 말씀이 바로 '자심반조(自心返照)'를 의미한다. 올해야말로 무중(霧中) 속에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선 목동처럼 모두가 자기를 찾아 나서야 할것이며, 세상 구하는 일을 절대로 남에게 맡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년식이 높아 출가(出家)하기도 틀렸건만, 허물어진 산사(山寺)의 벽에 그려진 '십우도(十牛圖)'를 보다가 범종(梵鐘) 소리에 놀란다. '自心返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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