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많은 작가들의 작업실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산속에 외롭게 버려진 누추한 작업실은 처음이었다. 세상의 모서리에서 겨우 버텨나가는 지상의 방 한 칸, 그곳에는 어떤 절박과 극한이 몸을 섞고 있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화가 김근태의 작업실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구가 고향인 김근태(1949~2003)는 20대에 서울 명동화랑에서 우연히 권진규의 조각작품 '자소상'을 만난 뒤 자신의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고는 자신도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평범하게 밟는 미술 공부를 그는 하지 못했다. 대신 경주의 한 모퉁이인 건천읍 송선리의 남애서당에 흘러들었다. 산사에 딸린,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서당에서 그는 목숨을 건 예술의 길에 들어섰다. 그림으로써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 그것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로 칩거하여 마치 끝장을 보리라는 각오였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 20여 년 동안 산속에서 지게 지고, 나무하고, 물 길으며 호롱불에 의지하여 그림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방 한 칸에 갇힌 채 목숨을 건 작업이었다. 물론 조각을 하고 싶었지만 경제적인 벽에 막혀 드로잉만 했다. 판화지의 일종인 백지를 펴고, 곱게 빻은 흑연가루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작품을 완성해갔다. 손가락으로 수천 번씩, 밤을 새워 문지르는 그의 작업은 마치 종교적 수행과도 같았다. 불과 1, 2cm를 그려내는 데 몇날 며칠이 소요되었다. 단 한 점이라도 작품다운 작품을 남기고 죽겠다는 결의로 번득였다. 그의 작품은 단색이지만 단단하고 견고한 외연을 가졌다. '더 이상 못 날으리', '왕의 무덤', '사랑의 힘', '자유로운 춤'…. 작품 제목에서도 스스로를 다지듯 촘촘하게 다진 흔적들이 뚜렷하다. 그는 1999년 아트선재미술관에서 열린 '산수풍경(山水風景)'전을 비롯해 네 번의 단체전과 두 번의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으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경주 출신으로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화가 김영길이 최근에 발간한 책 '조형은 골법이다'에서 김근태와의 인연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2002년 여름, 전시장이나 작업실이 아니라 병실에서 김근태를 만났다. 그는 환자였고 나는 병원의 직원이었다. 그의 병실에는 철학 문학 음악 분야의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오페라와 건축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의 진료비와 외출에 대해 걱정했다. 여전히 그는 내가 선 현실에선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럴수록 현실은 더욱 그를 향해 비수를 겨누었고, 세상과 등을 졌다. 병원에서 만났을 때 꽁지머리를 한 그가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뒷모습이 오래 남았다. 마치 한 마리 학이 눈앞을 날아간 듯했다. 그가 내게 전해준 몇 장의 엽서와 꽃물로 그린 편지를 읽는다. "꽃은 시드는 법이지만 진실의 향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붉은 진달래꽃으로 사랑의 술을 빚으렵니다. 기나긴 겨울 차디찬 당신의 가슴을 따뜻이 물들이기 위하여 나는 내 아픔의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쏟아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눈물은 봄비가 되어 당신의 이마를 빛나게 하는 녹색의 푸른 왕관을 수놓아 가렵니다" 그는 나에게 '예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말해준 셈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어떤 답도 주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나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한 번도 그처럼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 월드컵의 열기가 아직 뜨겁던 2002년 8월에 온 그의 편지는 이제 나를 향해 부채질하는 예술혼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자비와 사랑입니다. 눈물겹도록 우러나오는 시와 그림이며 춤과 노래입니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쉼 없이 흐르는 숲이요, 강입니다.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하나로 모아지는 사의 예술입니다. 아아 피안의 바다로 나아가는 영원으로의 여행입니다. 모든 고통 가운데 위로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시인이 말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