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28일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품위있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향후 안락사 문제가 우리 사회의 주요 화두로 등장할 전망이다.
법원은 이번 판결 전까지는 사실상 생명자체의 존속이 인간의 존엄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판단을 해왔다.
1997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환자에게서 인공호흡기를 떼어내 사망케 한 소위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가족과 의사에게 각각 살인죄와 살인방조죄를 물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법원은 모든 '의도된 죽음'을 타살로 간주해왔다.
이때문에 이번 결정은 그간 안락사에 관한 한 보수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던 법원이 고심 끝에 내린 진일보한 판단으로도 해석된다.
◇포괄적 허용보다는 제한적 허용에 무게
재판부는 이날 결정문을 통해 식물인간 상태인 김모씨(75·여)의 '죽을 권리'는 인정했지만 김씨 자녀들의 제기한 치료중단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전과 판이한 결정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포괄적인 의미의 안락사를 허용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법원은 환자의 고통으로 인해 2차적 피해를 입는 가족의 입장에 선 '안락사'가 아니라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기반 한 '존엄사'(또는 소극적 안락사)를 옹호했다.
실제로 이번 사건을 담당한 서울서부지법은 결정 직후 "안락사의 모든 유형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라며 "(환자가)무의미한 생명연장 장치를 제거하는 문제만 인정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생사여탈의 권리는 오로지 개인에게만 달려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안락사 허용에 줄곧 반대입장을 취해온 기독교계는 이번 결정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기독교교단협의회 생명윤리위원장인 박용웅 목사는 "기독교계는 기본적으로 안락사든, 자살이든 모두 동일한 죄로 판단한다"며 "생명의 주체는 하나님이다. 다른 사람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매우 잘못된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박 목사는 "환자인 김씨는 현재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어떤 의사표현도 할 수 없는 상태"라며 "법원은 김씨의 평소 행적을 들어 '죽을 권리'를 부각시켰지만 추론 이상의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말해 결정에 모순이 있다는 입장이다.
그는 "의사가 생사여탈권을 쥔 판관이 될 수 있고, 장기 팔아먹는 사람도 생기는 등 2차적인 문제가 더 많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반면 국가생명윤리위원회 손명세 교수(연세대 의대)는 "윤리역사상 기념비적인 판결"이라며 적극적인 환영의 뜻을 밝혔다.
손 교수는 "모든 사회에서 국민들이 어떤 사안에 걸쳐 불편함을 느끼고 고쳐져야 한다고 한다면 그런 것들은 허가받게 된다"며 "존엄사가 이런 케이스"라고 말했다.
손 교수는 "인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환자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라며 "이번 판결은 1976년 미국 뉴저지에서 카렌 필란사건과 똑같은 경우로 환자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결정과 관련, 이목이 쏠린 한국자살예방협회측은 단지 "생명의 존엄성 문제"라며 언급을 피했다.
◇세계적으로는 소극적 안락사가 대세
안락사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전세계 국가들이 안고 있는 인화성 높은 논란거리다.
스위스는 안락사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스위스 법원은 '이기적 동기에 의한 자살방조를 금지한다'는 형법조항을 이기적이지 않은 경우는 허용할 수도 있다고 역으로 해석, 18세 이상 말기환자에의 치사 약물 처방을 사실상 허용하고 있다.
미국은 '오리건주'가 1994년 11월 주민투표를 통해 18세 이상 말기환자가 의사에게 치사약물 투여를 요구할 권리를 갖는 안락사 법을 가결했지만 주에 따라 안락사 허가·불허가 엇갈린다.
호주의 노던 테리토리 주의회는 1995년 안락사를 허용하는 '말기환자의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2년 뒤 연방의회가 이 주법을 위법이라고 표결해 논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외국의 사례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적극적 안락사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소극적 안락사에 대하여는 일정한 요건 하에서 허용하는 추세다.
기본적으로 안락사란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의 단계에 들어선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그 환자를 죽게 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번 판결 역시 전 세계적 추세와 마찬가지로 극심한 고통의 경감 쪽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이번 결정은 경제개발기구(OECD)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에 비춰볼 때 크고 작은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생명윤리계에선 "당장 경제난과 맞물린 진료비 가중을 못 견딘 가족들의 유사소송이 줄이을 수도 있다"고 입을 모았다.
안락사에 대해 관대한 네덜란드의 경우,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2565건의 안락사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된 바 있다.
이번 결정이 자칫 우리사회에서 '안락사 러시' 사태로 발전할 가능성을 품었다는 우려섞인 지적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