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죠. 그 교훈으로 이미 나는 코리안드림을 이뤘답니다.”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온지 13년 만에 어느덧 그 꿈을 이뤘다는 조만숙(41·중국인)씨는 “풍족하진 않아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즐거운 일터가 있어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풍요롭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출발은 좋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사는 나라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환상이 깨진 것은 한국에 도착한 직후다. 1995년 여름, 소개를 통해 어렵게 찾아간 신혼집은 경상북도 영천시에서도 한참을 돌아 들어가는 농촌 마을이었다. 남루한 차림의 남편과 시어머니가 허름한 농가에서 그녀를 맞았다. 중국에서는 유치원 교사로 손에 물도 묻히지 않고 곱게 살았던 그녀가 이제 이국땅에서 낯선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호미와 곡괭이를 잡고 밭을 갈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평생 농사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하루에도 몇번씩 도망칠 궁리를 하면서 일단 몇달을 버텼다. 비싼 항공료가 자신의 발목을 잡은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마음에 변화가 생긴 것은 결혼 5개월이 지났을 무렵, 시어머니가 갑작스레 뇌출혈로 돌아가신 이후부터다. 몸도 성치 않은 처지에 누구 하나 챙겨줄 사람도 없는 남편이 안쓰러웠다. 자신은 떠나버리면 그만이지만 남편이 받을 주변의 멸시가 걱정됐다. “중국인 색시가 왔다고 주변에서 관심을 가졌었는데, 내가 도망갔다면 여기서 나고 자란 남편은 부끄러워서 얼굴 들고 살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으니 노력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참고 버텼어요.” 그렇게 버틴 세월이 7년. 그녀는 허리가 휘어져라 농사일로 생계를 이었다. 남편도 그런 정성에 감복하고 아내를 늘 다정다감하게 대했다. 그 사이 딸 설빈(12)이와 아들 성표(10)도 태어나면서 화목한 가정이 틀을 잡기 시작했다. 2002년 그녀는 농사일을 접고 남편을 대신해 취업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영천의 한 자동차부품회사에 취직한 그녀는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8시30분까지 장장 12시간 교대 근무를 하면서 또 다시 5년을 더 버텼다. 지난해 1월, 그녀는 결혼이주여성들의 한국어 교육을 위한 방문지도사 교육에 참가했다. 한국말이 원어민만큼이나 능숙했고, 결혼이주여성들의 입장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한달 교육과정을 수료한 그녀는 지난 3월부터 중국인 야오시유롱(여·39)을 비롯한 영천지역 결혼이주여성 3명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2번씩, 오후 3시30분부터 5시30분까지 매주 총 6차례에 걸쳐 한국어 방문 지도를 하고 있다. 정부지원으로 진행되는 사업인만큼 큰돈을 벌수는 없지만 험한 일 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도 많아졌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스럽다. 즐겁게 일을 하며 보람을 찾다보니 가정도 편안해졌다. 벌이가 아쉬웠는데, 때마침 영천시내의 한 마트에 취업하면서 그 문제도 해결했다.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마트에서 일하고, 이후 5시30분까지는 강의에 나선다. 시간도, 환경도 예전보다는 모두가 여유로워졌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학업에 열중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졌다. 엄마의 지극한 노력 덕분인지 초등학교 6학년인 딸 설빈이가 올해 전교회장으로 뽑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치맛바람조차 없이 이렇게 잘 성장한 딸이 엄마는 그저 대견스럽다. 영천시 고경면 석계리. 그녀의 집은 13년 전 처음 한국에 온 그때 그대로지만, 자상한 남편과 예쁜 아이들이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밝은 내일을 꿈꾸는 행복의 보금자리로 달라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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