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새(國璽)를 찾았다.
고종황제가 사적인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의 국새다. 분실된 줄만 알았던 국새를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이 국외반출 중요문화재 구입 과정에서 2008년 12월 찾게 됐다.
국새는 전체높이 4.8cm, 무게 794g으로 외함이 분실되고 내함만 남아있었다. 손잡이는 거북형이며, 비단실로 짜여진 끈이 달려 있다.
정사각형의 인장면에는 ‘皇帝御璽’(황제어새)라 양각돼 있다. 내함은 황동(黃銅)의 재질로, 2단으로 되어 있었으며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 윗단에는 국새를 넣도록 돼 있었다.
네면이 경사진 뚜껑의 하단은 붉은 비단이 접착돼 있었고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cm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붙여 마무리했다.
거북형손잡이의 성분은 은과 금의 비율이 81대18이며, 몸체는 57대41의 비율로 은이 많이 사용됐다. 손잡이와 몸체가 따로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국새의 글씨 중 황제의 ‘皇’(황)은 일반적으로 ‘白’의 아래에 ‘王’을 두지만 이 어새에서는 ‘自’의 아래에 ‘王’가 표기돼 있었다. 그 당시에 제작된 각종 고종 친필 비석군(碑石群), 어보(御寶), 의궤(儀軌) 등에서도 ‘皇’자는 모두 ‘自+王’으로 적혀 있음을 확인했다.
고종황제가 국가환난의 조짐이 보이던 1903~1906년 독일, 이태리,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통의 친서에 2 종류의 황제어새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하나는 1903년에 이태리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글씨체가 둥글고 전체적으로 부드럽다. 다른 하나는 1906년에 러시아황제 등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글씨체가 각이 지고 반듯하다.
이번 확인된 국새에 대한 제작기록은 찾을 수 없었으나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광무5년 11월16일)으로 미루어 1901~1903년 사이에 제작되어 1903년에 이태리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궁박물관은 “이 국새는 ‘대한국새’, ‘황제지보’ 등이 주로 사용되던 공문서가 아닌 친서에 주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황제가 직접 소지하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원래 국새는 상서원(尙書院)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이 국새를 직접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동시기에 만들어진 어보(御寶, 의례용)와 국새(國璽, 실무용)를 비교해보면, 어보의 무게는 3.4kg으로 국새의 4배에 달하며, 크기에도 큰 차이가 있다. 주재료에 있어서 어보는 은과 구리가 주성분인 반면, 국새는 은과 금으로 제작되어 의례용과 실제 사용함에 있어서의 구별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고 전했다.
향후, 국립고궁박물관은 국새를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지정신청 할 예정이다. 시민들에게 특별공개하고, 고종관련 자료 전시에도 활용하는 방안도 계획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