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피리를 제대로 불려면 입술이 100번도 넘게 찢어져 피가 맺히고 굳은살이 박혀야합니다. 소리를 내기만 하는데도 무척 오랜 시간이 걸리지요”
2000년 4월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박찬범씨는 풀잎 하나로 궁중음악에서 민요, 가요, 팝송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연주가 없는 풀피리 연주자이다. 현재 광진국악관현악단 단장이기도 한 그는 “귤이나 유자 잎이 소리를 내는데 가장 좋다는 기록이 있지만 상추나 깻잎 등 주변의 모든 잎을 풀피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박씨가 처음 풀피리를 접한 것은 아버지로부터이다. 전남 영암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나무하러 다니던 그는 어느날 아버지가 부는 풀피리 소리를 듣고 반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풀피리 부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지만 ‘쌍놈 된다’며 되레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풀피리 부느라 사흘씩 결석해 얻어맞기도
어려서부터 유난히 휘파람을 잘 불던 그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풀피리를 어깨 너머로 배웠다. 사흘씩 학교를 결석한 채 뒷동산에 올라가 풀피리를 불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죽도록 매를 맞았던 적도 있었다.
목수 일을 배워 18살 때부터 전국의 건설현장을 누비고 다니던 그는 풀피리로 시름을 달랬다. 점심밥을 먹고 난 뒤 고된 일에 지친 인부들에게 소리 한 자락을 불어주기도 하고, 하루 번 돈을 쪼개 노인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그의 풀피리 실력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 방송국 PD가 술집에서 친구들을 위해 풀피리를 불던 그의 모습을 본 후 방송에 출연시킨 이후부터였다. 순식간에 유명해진 그는 그때부터 동네 노인잔치나 구청 문화제 등에 불려 다니며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하면서 1997년 세계 피리축제에 한국대표로 출전했고, 1998년에는 정동극장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협연을 하기도 했다. 그밖에 미국 UCLA, 호주 시드니 오페라 극장 등에서도 공연을 했다.
영화나 드라마 배경음악 제작 계획
최근 모 방송국의 ‘가치 대발견 보물찾기’ 프로그램에 출연해 풀피리를 부는 그의 입술에 대한 감정가가 10억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박찬범씨는 음악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처음에는 나무 막대기에 1,2,3 번호로 음의 높낮이를 표시하고 톱으로 선을 그려 빠르기를 표시해 곡을 만들었다. 고등학교 음악수업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서 귀동냥을 하기도 하고, 동네 피아노학원에 가서 아이들 피아노 배우는 것을 구경하기도 하며 하나하나 음악적 지식을 쌓아 요즘은 직접 악보도 그리고 곡도 만든다.
요즘 그는 새로운 구상으로 몸과 마음이 분주하다. 그동안 냈던 음반을 다듬어 다시 출반하는 한편, 풀피리 연주를 이용해 영화나 드라마에 사용하는 효과음과 배경음악을 만들 계획이다.
“온 천지가 악기가 될 수 있는 풀피리는 악기 구입비용이 들지 않아 제일 좋다”는 그는 “풀피리처럼 애절하고 슬픈 감정을 잘 표현하는 악기도 드물다”고 자랑했다. 그는“젊은 사람들이 우리 전통 악기인 풀피리에 대해 애정을 가져야 우리 것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다”며 우리 고유의 음악, 고유의 문화에 대한 관심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