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풀들이 갖는 생명력을 감히 우리가 넘볼 수 있기나 할까요? 한두 주일 만에 찾는 시골집 마당은 나름대로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다 여기던 내 생각에 쨍-하고 금이 가게 합니다. 특히나 장마철에는 하룻동안에도 풀이 쑥쑥 자라는 소리가 들리고 세력을 벋어가는 모습이 보인다고 생각할 정도로 맹렬하게 자랍니다.   잡초를 뽑으면서 배우게 된 것도 많습니다. 잡초를 알기 전에는 모든 풀들이 봄이 되면 다 같이 돋아나고 늦은 가을이 되면 다 같이 시들어 죽는다는 무지(無知)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은퇴 후 자주 시골집에 다니면서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꽃다지나 냉이처럼 이른 봄에 돋아나서 꽃을 피우고 여름이 되면 서둘러 씨앗을 맺고 한살이를 마무리하려는 놈이 있는가 하면 바랭이, 쇠비름, 명아주처럼 늦은 봄에 올라와서 여름 동안 왕성하게 벋어나 굵고 크게 자라는 놈도 있더군요. 특히 뿌리까지 뽑아 놓아도 어떻게든 다시 살아나는 쇠비름의 질긴 생명력은 어떤 일에 지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쉬이 포기하려는 내 나약함에 무언의 꾸지람이 되어 다가옵니다.   초여름에 고구마 순을 묻어둔 고랑 사이로 명아주도 지천으로 올라왔습니다. 내 어릴 때는 명아주를 도투라지라고 불렀었는데 지금 주변에서 그 말을 쓰는 사람은 못 본 것 같습니다. 한 살 위이던 이웃집 동무랑 도투라지 잎을 짓이겨서 김치라 하며 소꿉놀이를 하면, 명아주 잎 뒷면의 하얀색 가루가 살갗에 묻어서 가렵다고 연신 긁으면서도 딸 역할을 하던 나에게 엄마가 되어 따따따따 잔소리를 해대던 키가 나보다 손바닥 하나는 더 컸던 그때 그 동무는 다른 동네로 이사간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지만 아직도 명아주는 지천으로 올라옵니다. 그대로 두면 고구마는커녕 아예 명아주 밭이 될 기세여서 땀으로 옷을 적시며 여기저기 두서없이 훑어서 풀을 뽑아냅니다.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는 명아주는 는장이, 는쟁이라고도 부르는 한해살이 풀입니다. 간혹 어린 순은 데쳐서 나물로 먹기도 했습니다. 그대로 자라게 두면 명아주는 키가 1∽2미터까지 자라고 푸른색 세로줄 무늬가 난 줄기는 굵고 억세어져서 한해살이 풀이라기보다 어지간한 관목처럼 보일 정도로 왕성하게 잔가지를 벌어가며 쑥쑥 자랍니다. 꽃잎이 없는 연녹색 꽃들이 대궁이 맨 위에 오밀조밀 달리지만 사람도, 벌도 그다지 탐내지 않을 정도로 꽃 모양새는 소박합니다. 그렇지만 명아주가 요긴하게 쓰이는 곳이 있습니다. 크게 자란 굵은 줄기는 예부터 좋은 지팡이의 재료로 쓰여 왔습니다.   명아줏대로 만든 지팡이를 청려장(靑藜杖)이라 부릅니다. 청려장은 굵고 크게 자란 명아줏대를 손질하여 찌고 말린 후 거기에 옻칠을 하여 만드는데, 가볍기도 한데다가 명아주 줄기의 잎자리나 곁가지 자리가 그대로 울퉁불퉁한 청려장의 표면이 되어 손바닥에 자극을 주니 뇌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만든 청려장은 웬만한 쇠로 두들겨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가볍고 단단하여 과거에는 아버지가 50세가 되면 아들이 청려장을 선물하였다 합니다. 조선 시대에는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았기에 70세가 된 장수 노인들에게 나라에서 기로연(耆老宴)을 베풀고 청려장을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1992년부터 세계노인의 날인 10월 2일에 100세를 맞는 노인들에게 대통령이 청려장을 선물해오고 있다 합니다.   수년 전 도산서원을 찾았을 때 퇴계선생 유물관에 전시된, 옹이가 많이 진 청려장을 보았습니다. 퇴계선생이 그 청려장을 짚고 아끼던 매화나무에 물을 주었으려니 상상하니 그 지팡이가 단순한 물건을 넘어 노학자의 삶이 담긴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우리집에도 주인 잃은 청려장이 하나 있습니다. 여든이 되던 해에 그것을 선물로 받고 좋아하시던 시어른은 서너 해전에 작고하셨으나 단단한 사물인 막대기는 아직도 사랑방 한 쪽에 세워져 있습니다. 지팡이라는 말이 ‘짚다’에서 온 낱말이니, 노인이 되신 어른이 나들이하실 때 그것은 또 하나의 다리가 되어 노구를 지지할 힘을 보탰을 것입니다. 남겨진 지팡이를 볼 때면 장성하여 각기 자기 일에 바빠 시간을 못 내는 자식들보다 어쩌면 청려장 지팡이 하나가 나들이할 때 더 든든한 의지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에 죄송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뽑혀서 버려지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잊히겠지만, 살아남아 잘 자란 명아주는 보잘 것 없는 잡초를 뛰어넘어 의미 있는 무엇이 됩니다. 도움이 필요할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어 청려장이라는 이름도 얻고 지팡이로서의 생명도 얻게 됩니다. 살면서 복병처럼 불쑥불쑥 맞닥뜨리는 절망이라는 이름의 순간을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남는 것, 그것이 좌절을 벗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용기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라고 명아주 지팡이가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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