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는 고려 말 24세 되던 해인 1360년(공민왕9년) 과거에서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삼장(三場)에 잇달아 합격하면서 그것도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학자이며 고려의 충신이다. 특히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의 시조로 불리며 시와 글, 그림에도 뛰어났고 그의 애국충절 단심가는 오늘날 우리의 산 교훈이 되고 있다. 포은 선생은 목은 이색, 야은 길제와 함께 고려 3은의 한 사람으로 사 후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에 안장되어 있고 동방 18현의 한 분이 되어 문묘에도 배향되어 있다. 포은선생의 묘소가 이곳 경기도 용인에 안장된 유래가 특이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정몽주는 이성계(1335~1408)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에 끝까지 동조하지 않았다. 1392년(고려 공양왕4년) 4월4일 저녁 정몽주는 이성계를 만나 국정을 논하고 귀가하던 중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수하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을 당했다. 정몽주가 죽은 후 그 피를 흘렸던 자리에는 정몽주의 곧은 절개를 말해주듯 대나무 1그루가 솟아났고 그 장소가 원래는 선지교(善地橋)였으나 그 대나무로 인하여 선죽교(善竹橋)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는 원래 경북 영천시 임고면에서 태어났으나 나라의 관원으로 개성에서 생활했으니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개성 땅에 묻히게 된다. 후손들은 고려의 충신이며 절개가 곧은 포은 선생을 고향인 영천으로 모시고자 계획하였고, 태종 이방원은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복권시켜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려주고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토록 허락했다. 태종6년(1406) 드디어 후손들과 많은 유림의 선비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아침 일찍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 영천으로 내려가는 도중 지금의 경기도 용인 풍덕동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명정이 날아가 버렸다.    바람에 날려 명정이 떨어진 곳을 이상하게 여긴 후손들이 지관을 불러 물어보니 이 자리는 보기 드문 명당이라고 하면서 이곳에다 시신을 모실 것을 권유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은 “하늘이 충신을 알아보고 자리를 잡아 주었다”고 감탄하면서 명정이 바람에 날아가 문수산(221m) 아래쪽 지금의 묘역에 떨어진 것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모시게 되었다. 포은의 묘역은 왕릉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큰 규모다. 입구에는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는 신도비각이 있고 커다란 홍살문이 참배객들을 맞이한다. 지금도 용인에서는 매년 5월이면 선생의 넋을 기리고 그의 충절과 효, 뛰어난 정신문화를 계승하기 위한 포은문화제가 매년 열리고 있다.   나라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종8년(1553) 고향인 영천 임고면에 서원을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선조 36년(1603)에 다시 복원하여 임금으로부터 이름을 받았으니 사액(賜額)서원이 되었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또 다시 철거 되었다가 1965년에 정몽주의 위패만을 모시고 다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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