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웠던 폭염은 기세가 한풀 꺾기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추풍이 노모(老耄)의 겨드랑이에 계절적 감각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안력은 쇠진하여 책을 읽기가 점차 힘들어지고 있지만, TV 화면에 비친 세상의 시비(是非) 소리가 듣기 민망하여 독서를 해보고 싶어서 서가에 방치된 분진에 쌓인 김삿갓 고본 시집을 찾아 펼쳐 보았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명기 가련(可憐)과 만나 정담을 나눈 시구가 인정이 삭막한 세상에 꺼져가는 시성(詩性)을 되살리는 힘이 있는 것 같아서 의미 깊게 새겨보았다. 가련은 함흥 명기이다. 그녀는 가무를 잘 하였지만 또한 시를 좋아하는 유식한 기생이었다고 한다. 김삿갓은 동기(童妓) 명월로부터 가련을 소개 받고, 그를 대해보니 천하미색에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며 통쾌하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련도 많은 남성들을 상대해 보며 나름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기생이었으나 막상 김삿갓을 대하니, 처녀처럼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머리가 저절로 깊이 수그려졌다. 김삿갓은 만세교 부근에 있는 가련의 집에 초대받아 방안에 들어와 보니, 당나라 왕유(王維)의 시 ‘춘계문답(春桂問答)’이라는 족자가 문미(門楣)에 걸려있어서 시각을 당겼다. 봄날 계수나무에게 묻노니(問春桂), 복사꽃 오얏꽃 피어 한창 향기로워(桃李正芳菲). 가는 곳 마다 봄빛이 가득한데(年光隨處滿), 그대만은 어찌하여 왜 꽃이 없는 가(何事獨無花). 계수나무가 대답하되(春桂答 춘계답) 봄의 그 꽃들이 어찌 오래 갈 건가(春花詎幾久) 낙엽이 우수수 가을철이 되면(風霜搖落時) 나 홀로 꽃 필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獨秀君不知) 당나라 왕유는 서른 살에 상처하고 나서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여생을 경치 좋은 산수만 찾아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그 족자는 왕유가 지은 춘계문답이란 시문을 가련이 직접 쓴 묵서였다. 김삿갓이 잘 쓴 글씨라고 칭찬하니 교방에 다닐 때 심심파적으로 써 보았다는 것이다. “제가 비록 우둔한 계집이기는 하지만 삿갓 어른의 고매하신 인품을 어찌 모르오리까. 천리 타향에서 노류장화의 몸으로 항상 외롭게 지내다가, 천만 뜻밖에도 삿갓 어른을 만나 뵙게 되어 진정 기쁘옵니다.” 가련은 술을 따르고 가야금으로 전주곡을 한바탕 뜯다가, 마침내 음률에 맞추어 애절한 목소리로 <애원성>을 불렀다. 술 취한 강산에 호걸이 춤추고, 돈 없는 천지에 영웅도 우누나. 에---얼싸 좋다 얼 널널거리고 상사디야. 금수강산이 아무리 좋아도 정든 님 없으면 적막강산이라. 에---얼싸 좋다 얼 널널거리고 상사디야. 무심한 저 달이 왜 이다지도 밝아 울적한 심회를 어이 풀어 볼까. 에---얼싸 좋다 얼 널널거리고 상사디야.김삿갓은 노래를 듣기 전에는, 이름이 가련이오 얼굴도 가련한데(名之可憐色可憐). 가련은 마음조차 가련 하구나(可憐之心亦可憐).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듣고 보니 천하명창 수준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삿갓은 은연중에 안긴 가련을 위해 즉흥시 한수를 읊었다. 젊은 몸에 기생을 품으니 많은 돈도 티끌 같고(靑春抱妓千金芥), 이 밤에 술까지 나누니 모든 일이 구름 같네(今夜當樽萬事雲). 먼 하늘 날아가는 기러기 물을 따라 내려앉듯(鴻飛遠天易隨水), 푸른 산속에 나는 나비 꽃을 피하기 어렵도다(蝶過靑山難避花). 가련은 흥청거리는 사내들을 백안시하며, 항상 고고하게 살아온 여자였지만 그러나 김삿갓만은 그의 시에 반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삿갓의 시를 듣고 가련은 옛날 기생 소홍(小紅)의 시로 답해 보았다. 찬바람 눈보라가 주렴 발에 몰아쳐도(北風吹雪打簾波), 얼음 어는 겨울밤 잠 못 이루고 안타깝다오(氷夜無眼正若何). 이 몸이 무덤 되면 누가 찾아오려는 가(塚上他年人不到), 가엾고 외로운 오늘날 한 송이 꽃이라오(可憐今世一枝花). 김삿갓은 ‘가련금세일지화’라는 말귀(末句)에 가슴이 찡해 오는 것만 같았다. 고개 숙이며 속삭이는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즉흥시 한 수를 또 읊었다. 창가에 마주 앉아 희롱을 하다 보니(對月紗窓弄未休), 반쯤 아름답게 아양 부리고 수줍은 그 자태이네(半含嬌態半含羞). 그토록 좋으냐고 낮은 소리로 조용히 물으니(低聲暗問相思否), 손으로 금비녀 만지고 웃으며 고개만 끄덕이네(手整金釵笑點頭). 김삿갓이 기생 가련을 만나 나눈 시담에 담긴 정분이 인생사에 대해 뭔가 가슴에 다감한 자극적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것 같다. 고운 최치원 선생도 소란한 세상사가 듣기 싫어서 관직을 버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며 첩첩이 쌓인 돌 사이에 미친 듯이 흘러 떨어지는 물소리가 사람의 말소리조차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게 한 것을 세상시비 소리가 귀 막게 하였다고 마음속에 묻어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며, 김삿갓이 어렵게 방랑생활을 하면서 온갖 세태를 시문에 담아 남긴 것 등은 모두 국가가 그 천재적 지성을 포용하지 못한 것이 오직 아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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