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주 5대양 – 지구상에서 ‘옷’을 입고 사는 존재는 사람뿐이다. 그런 까닭에 ‘옷’이란 글자의 모형이 사람의 모습 그대로다. 서 있거나 누워있는 형태로 상체는 머리와 목 그리고 양팔의 자세, 하체는 양다리가 사람의 형상이다.
사람이 옷을 착용하는 이유는 몸을 가리거나 꾸미기 위하여 몸에 걸치거나 입는 물건으로 한서(추위와 더위)를 조절하거나 외부로부터 장애를 막아 신체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옷은 의복 외에 피복·의류·의장·복장 등 여러 가지 표현으로 호칭된다. ‘의복’은 신체의 구간부(몸통 부분)에 착용하는 것을 가리키고, ‘피복’은 좀 더 넓은 범위의 모자·장갑·신(발) 등 신체에 착용하는 일체의 것이라 한다. 의복(옷)은 인간 생활에 있어 식량·주거와 함께 생활의 기본이 되는 중요한 요소인 의·식·주에 속한다. 이러한 실용성에서 장식성·사회성이 가미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인간 최초의 옷은 동물의 털가죽이나 식물의 잎 등으로 옷을 대신했다. 옷의 원자재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마(삼), 인도-목화, 중국-견(섬유), 유럽-양모로 동물성 섬유가 원료로 쓰였다 한다. 사람이 옷을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대별하면 예복·외출복·평상복·작업복 따위이다. 그리고 서양식 옷이라 하여 양복이 있고, 한국 사람들이 즐겨 입는 고유의 옷으로 아름답고 고운 한복이 있다.
 
영국 속담에, 옷이 날개고 옷이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식사는 자기 기호에 맞게, 옷차림은 사람들의 취미에 맞게 하라 한다. 우리의 옷이나 몸가짐이 우리의 과거 경력을 나타낸다. 값비싼 옷은 마음의 가난함을 말하고, 옷차림이 얼굴과 풍속을 변화시킨다.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이, 옷은 새것일 때부터 명예는 젊을 때부터 소중히 하라 했다. 육체에만 꼭 맞는 것을 입는 것보다 양심에 꼭 맞는 옷을 입는 것이 더 좋다 한다. 옷차림은 신분·교양·가문과 품위·인격을 상징한다는 말이 있다. 성경 ‘마가복음’서에,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라는 말씀으로 만왕의 왕이 되셨다.누구든지 좋은 옷을 입었을 때는 좋은 정신과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신용을 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옷은 값비싼 옷보다, 나이와 형편에 맞게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는 것이다. 미국의 과학자요 정치가인 프랭크린은, 음식은 자신이 즐겁도록 먹어라. 그러나 옷은 남의 눈에 즐겁도록 입어라 한다. 흔히들 옷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감추는 일은 많아도, 아름답지 못한 것을 가리지는 못한다.
김성식의 ‘의상의 전통’이란 글에, 한국 여성의 의상에서는 선(線)의 미(美)와 아울러 균형의 미가 있는데 또한 특색이 있다. 저고리가 짧으면 치마는 길게, 노랑 저고리면 남치마에 모두가 제격이요, 어울린 균형의 미가 있다고 한다. 옷은 인간의 역사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낙원에서 추방되자마자 의상을 걸치는 습속이 생겼고, 그 순간부터 인생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옷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옷은 필요한 하나의 형식이다. 마음은 비록 추악해도 옷만 단정히 입으면 천사의 얼굴로 거룩한 모습으로 나설 수 있고 순결한 마음을 가졌어도 옷이 불결하면 천민으로 생각되어 제외되고 마는 것이 인간 세상이라 한다. 복장은 역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어울리는 것이 따로 있는 것 같다. 야단스런 의상은 사람의 마음을 변덕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깨끗한 의복은 사람을 평가하는 소개장이 될 수 있고, 사람은 차림새에 따라 대우를 받고, 말씨의 정도에 따라 외면당한다는 말도 있다. 옷의 변화가 시대성이고, 아무리 좋은 옷도 그 신분에 따라 달라 보이고, 유행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것도 옷 뿐이라 한다. 이것이 의상의 발전사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