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울 것 다 비우고 나서야 더 당당한 것이이 겨울 지상에 또 있을까가장 명료한 직립흩날리는 눈발에 흔들리면서도결코섞이지 않는 도도함은 어디에서 온 걸까한여름에 온몸으로 한번하얗게 웃어 봤으니삭풍 부는 겨울날에는그만무릎을 꺽어앉아 쉬어도 좋으련만꽃향기 한창이거나촘촘한 씨앗 씨방 가득할 때 보다도홀가분한 가벼움만으로저 갈데없이 고결한 자존.. 박자경 시집<물의 속성>에서 * 박자경 시인의 ‘겨울 백합’ 시를 읽는다. 담백하면서 은은한 꽃의 향기가 어디선가 온다. “비울 것 다 비우고 나서야 더 당당한 것”, “가장 명료한 직립!” “갈데없이 고결한 자존” 무엇보다 절제된 언어들이, 이미지들이 묘한 긴장과 암시를 준다. 시인은 언어를 갈고 닦는 사람이다. 시인은 끝까지 적확한 언어를 발견해 내는 사람이다. 시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 송이 탐스러운 ‘겨울 백합꽃’이 맑은 하늘에 살아서 흔들린다. 무슨 기쁨처럼, 무슨 고통처럼 피어 살아있다고 흔들린다. 겨울 세파에 흔들리면서도 피어나는 저 꽃의 도도함, 저 고결한 자존의 모습은 어디서 올까? 비울 것 다 비운 텅 빈 마음에서 오는 걸까? 홀가분한 벗은 마음에서 올까? 우리 사는 이 세상이 아무리 눈발 흩날리는 겨울일지라도, 시인의 사유는 깊고, 시인의 영혼은 다이야몬드처럼 빛난다.이 시는 ‘시각적 감각’과 ‘보여주기’(showing)와 ‘생각하기’(thinking)의 시작 기법이 균형 있게 잘 자리 잡고 있는 시다. 주제가 분명하고 문장도 절제와 긴장 속에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다. 시라는 것은 이렇게 우리 마음속 풍경을 감각적으로 노래하고. 감각적으로 사무치게 만드는 언어 예술이다. 마이너 마리아 릴케의 아름다운 가을이 벌써 창 잎에 한걸음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