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안동에서 무덤 이장을 하던 중 다른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한 편의 한글 편지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일이 있습니다. 편지 쓴 이의 신원이 원이엄마라고만 알려진 이 편지는 젊은 나이로 병사한 고성 이씨 이응태의 부인이 남편의 병이 낫기를 빌며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서 삼은 미투리 한 켤레와 같이 출토되었습니다. 백발이 될 때까지 해로하고자 약속했지만 뱃속의 아이만 남기고 먼저 떠난 남편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담아 망자가 매장될 때 껴묻은 한글 손편지입니다. 한글로 쓰인 편지이기에 행간에 배어 있는 애통한 아내의 마음이 읽는 이에게 생생하고 고스란히 전해져 큰 감동을 주었기에 이후 원이엄마의 애절한 사랑은 소설로, 뮤지컬로 재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몇 년 뒤인 2012년 대전에서, 역시 묘역을 이장하던 중 한글로 쓰인 두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1409년 함경도에 군관으로 부임하던 나신걸이 아내에게 농사와 가정사를 두루 보살피라고 일러두는 내용과, 군관으로 복무하며 자신이 입던 철릭을 보내 달라는 내용에 붙여 아내를 위해 분과 바늘을 사서 보내며 그리워 울었다는 내용을 담았는데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양반층도 한글을 사용했다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올해 3월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밖에 선조나 정조처럼 임금이 쓴 한글 간찰들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동안 한글이 양반 남성들에게는 소외되고 부녀자들만 쓰던 ‘언문’이 아니었음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특히 정조가 당시 벽파의 거두로 정조와 사이가 좋지 않던 심환지에게 보낸 한문 편지에는 난데없이 ‘뒤쥭박쥭’이라는 한글이 버젓이 섞여 있습니다. 조선 국왕들 중 누구보다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유려하게 한문을 쓰던 정조가 ‘뒤쥭박쥭’에 해당하는 한자를 몰라서 그랬을 리는 없고, 벽파에 대한 언짢은 마음이 한문만으로는 표현하기 부족해서 그랬던 것일까요? 또 18세기 후반 서울에 거주하던 사대부 유만주가 한문으로 쓴 일기에도 ‘보숑보숑’, ‘머흘머흘’처럼 한글로 쓰인 의성어나 의태어들이 등장하는데 미루어 짐작하면 우리말만이 담고 있는 미묘한 느낌과 분위기를 한문으로는 온전히 살려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사대부층에서는 이를 반포하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상층 남성 엘리트들에게도 한글은 온전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할 독보적인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말과 글이 일치함으로써 속내에 담긴 미묘한 느낌까지도 온전히 전할 수 있으니까요. 18세기 실학자인 정동유는 ‘한문은 간결하면서도 오묘한 것을 존중하여 내용을 잘못 알아보기 쉬우나, 언문으로 왕복하면(생각을 주고받으면) 조금도 의심할 점이 없으니 부녀자나 할 학문이라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남성은 주로 한문을, 한글은 여성이 사용했다고 하는 이분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글은 말을 기록하여 기억을 저장하는 수단입니다. 말과 글이 같을 때 기억은 더 쉬워지고 더 풍부하게 기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듯, 한글은 배우기 쉬운 문자입니다. 그 덕에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1.7%로 OECD 국가들 중 가장 낮은 축에 듭니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에 한 업체가 게시한 ‘심심한 사과’를 누리꾼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반발한 웃지 못 할 사례에서 보듯 요즘 젊은 층이 글을 이해하는 실질 문해력은 70% 정도로, 많이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무운(武運)’을 ‘운이 없는’으로 해석하며,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착각한 예 등 주로 한글 세대로 자란 젊은 층들이 한자어를 이해 못하는 사례가 많지만, ‘사흘’이 3일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는 등 우리 고유어를 모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또 ‘안 돼’를 ‘안 되’로, ‘어이없다’를 ‘어의없다’로, ‘하나’를 ‘1나’로 쓰는 등 쓰기에서도 오류가 많이 나타납니다. 게다가 언어생활에 영향을 크게 미칠 수 있는 TV에서도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에 틀린 맞춤법이 버젓하게 뜬 화면을 접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없습니다.
유네스코는 해마다 ‘세계 문해의 날’인 9월 8일에 문맹퇴치에 공로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세종대왕 문해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한글로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 세종대왕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로 정한 상 이름입니다. 이렇듯 세계 어느 문자보다 과학적이면서도 쉬운 문자로 인정받는 한글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실제 우리의 언어생활은 오히려 ‘뒤쥭박쥭’으로 한글을 오염시키지는 않는지, 제 577돌이 되는 한글날을 맞아 한 번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