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삶은 우리들이 삶의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에 닫혀진다. 삶을 위해서 삶의 목적을 포기한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므로 자연의 원리를 배워라 한다. 사는 것(삶)은 이 세상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깊이 박혀 있는 뿌리이다. 많은 성인들이 인생이여 방황하지 말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한다. 자연을 두고 분명 창조주 하나님의 예술이지만 가꾸고 관리하는 것은 인간의 기술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그의 저서 ‘경험론’에, “인간은 안락하고 만족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안락과 무위(아무 일도 하지 아니함)의 만족에 빠지지 않게 하고 노고와 노동에 이겨내는 수단의 발견에 지혜를 쥐어짜게 하려고, 힘과 일 속으로 인간을 몰아 넣는 것”이라 했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은 법과 윤리와 함께한다. 자연은 하나님의 묵시이며, 또한 예술은 인간의 묵시이다. 자연은 절대로 우리를 기만하지 않지만 우리 자신이 언제나 자기를 기만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로지 자연에 순종함으로써만 자연을 지배한다. 진흙에서 연꽃이 핀다. 이 점에서 자연은 시인이다. 인도 시인 타고르는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대자연은 ‘생명의 샘’이라 한다. 자연은 언제든지 동정과 선심으로써 사람에게 베푼다. 그러나 그 동정, 그 선심을 동정과 선심답게 받을 만한 준비와 기력이 흔히 사람에게 핍절(완전히 없어짐)하다는 것이다. 자연에는 순리(도리나이치)가 있다. 옛 속담에 강물을 모래로 막을 수 없고, 홍수를 물통으로 퍼낼 수 없으며, 하늘에 걸린 무지개는 도저히 손으로 잡을 수 없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가 가장 안전하고 만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천지만물은 모두가 자연이 낳은 소산물이다. 천지만물은 하늘과 땅-우주에 있는 모든 것인 만유를 말한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에게 소요되는 바를 공급해 준다. 인간의 목적은 주지(모두가 아는 지식)하는 바와 같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과학·교육은 단순히 자연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몇 가지 보기로, 예술-창작, 과학-증명, 종교-신앙, 철학의 진리, 모두가 자연의 모체에서 파생한 것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자연은 예술의 창고다. 예술은 의식적으로 미(美)를 창조해 내는 활동이다.그러나 일체의 실리를 떠나 창조적·직관적으로 미적 이념을 표현하는 인류문화의 중요한 현상의 하나이다.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무용·건축·조각 등을 포함하여 광의(넓은 뜻)로는 기술·기교까지도 말한다. 더욱 세분하면 건축, 조각, 회화(그림)는 조형예술이고, 무용, 연극은 표정이며, 음악은 음향예술로 시, 소설, 희곡, 평론은 언어예술인데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우리의 생활까지 자연에서 생성된다.자연은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서 존재하는 것이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동·식물을 비롯하여 산, 강, 바다, 비, 바람, 구름 등이다. 그리고 사람이나 물질의 본디 성질인 본성이기도 하다. 지배는 거느려 부리는 것으로 다스림과 통치에 속한다. 또한 지배는 어떤 사람의 의사가 상대자에게 행위를 규정하여 얽어 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관계에서는 아랫사람을 다 잡아 처리하는 것으로 약간의 강압성이 내포된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고통과 공포라 한다. 지금 사람은 고통과 공포를 좋아하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고 있으며 자연에 파묻혀 사는 것이다. ‘시편’ 기자의 말씀-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 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라 했다. 그러나 인간 모두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자연이고 자연인이 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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