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의 문신이면서 서예가로 유명한 봉래 양사언(1517~1586)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중종 35년(1540) 유명한 단사부(丹砂賦)를 지어 성균관 진사에 뽑힌 인물로 훗날 불행하게도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가 곧 바로 돌아가셨으니 산소아래 여막에서 6년간이나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그는 상(喪)을 마친 다음 명종 1년(1546)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에 발탁되었으며 그 후 삼동현감, 평창군수, 강릉부사, 함흥부윤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드나들어 만폭동 바위에 새긴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란 글씨를 남겼고 ⌜금강산유람기⌟를 짓기도 했다. 선조 10년(1577) 안변부사가 되었는데 그곳은 관북(關北)관문의 도회지로 풍속이 거칠고 까다로워 정무지침(政務指針)을 효제(孝悌)제일주의로 삼아 민속교화에 큰 성과를 거두게 되니 백성들이 양부사(楊府使)를 친어버이 같이 받들었다고 한다. 함경도 관찰사는 그를 도내 제일의 관료라고 조정에 상신하여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에 올랐다.    그러나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의 무덤인 지릉(智陵)의 화재사건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황해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 후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0여 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백리로 이름났고 유족에게는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초서와 큰 글씨에 능해 안평대군과 김구, 한호 등과 함께 조선의 4대 명필(서예가)로 손꼽히며 그가 남긴 태산가(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는 현재까지도 우리들의 뇌리 속에 아련히 남아있다. 한편 예언가 격암 남사고에게 수학 하였는데 선조 25년 임진왜란과 선조 40년(1607) 누루하치난을 미리 예견하였고 북한의 평양 대동문 편액가운데 초서체로 쓰인 현판이 그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현재 포천시 향토유적 제 32호로 지정되어 있는 그의 묘소는 포천 금주산 아래에 있고 이곳은 본인이 살아생전 점지한 신후지지(身後之地)라 한다. 봉분은 3단 호석으로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비두에 연화문이 조각된 묘비와 상석, 향로석 그리고 좌우에는 동자 문인석, 망주석이 배치되어있으며 바로 아래에는 숙부인 음성박씨와 간성이씨 두 부인이 합장으로 모셔져있다. 묘소 뒤에 주산인 금주산은 금형의 탐랑봉으로 혈장에 좋은 기운을 보내주고 있으나 주산에서 혈장까지의 용맥이 큰 움직임이 없이 그냥 길게 내려오고 있어 지기가 왕성한 곳은 못된다.    그러나 혈장은 나름 용맥의 끝자락인 용진처에 자리 잡았고 묘소 앞자락 끝은 기운을 가두어 주기 위해 행룡해 온 용맥이 급하게 머무른 듯하다. 그 결과 전순 밑으로는 급경사지를 만들어 묘소에 올라오려면 93개나 되는 돌계단을 밟고 올라와야 묘소에 당도할 수가 있다. 좌우 용호가 가까이서 감싸주지를 못해 장풍(藏風)이 되자않아 묘소의 봉분과 주변에는 잔디가 잘 자라지 못하고 있고 수세는 좌선룡에 우선수로 합법하며 좌향은 축좌미향으로 남남서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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