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부엌 앞에 서본다. 그곳에서면 나도 모르게 어렸을 적 기억으로 되돌아가곤 한다. 지난날 기억 속에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을 하며 항상 이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다.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 날리더라.” 라는 가사의 당시엔 제목도 모르던 유행가를 말이다. 그때는 어머니가 부르는 노래를 무심코 들었다. ‘일하다가 적적해 노래를 부르나보다’라고 생각 했다.
  그 당시 얼핏 듣기에는 애조 섞인 노래라는 것은 느꼈다. 하지만 그때는 노래 가사 의미마저 미처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나이가 어느덧 서른이 훌쩍 넘고 보니 어머니 노래를 허투루 들어왔음을 새삼 깨닫는다. 노래 선율이 너무 아름답고 가사도 삶의 철학을 함축시킨 듯하다. 또한 세상 어느 감미로운 선율로 연주하는 클래식 음악과 견주지 못할 만큼 마치 한편의 시 작품과도 같은 대중가요 가사여서 이다. 어느 날 문득 ‘평소에 어머니가 집안일을 하면서 그 노래를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 에 대한 생각 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는 우리 세 딸을 키우기 위해 늘 쉴새 없이 일을 했다. 특히 나의 음악 공부를 가르치기 위해 더욱 물불 가리지 않고 일에 전념했다. 학창시절엔 철이 없어서 그렇게 늘 자식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어머니 희생과 헌신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즘 돌이켜보니 지난날 어머니 희생이 안쓰럽고 애처롭다.
  자신 보다 오로지 자식을 위한 삶을 살아 온 어머니에게 유일한 낙은 자신 보다 자식들이 건강하고 매사 잘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또 다른 낙이라면 잠시지만 노래로나마 삶의 고단함과 애환을 표출 하셨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내가 지난날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은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그런 헌신적인 사랑을 미처 깊이 깨닫지 못한 탓인 듯하다.
  한결같은 그 사랑과 헌신은 가없어서 숭고하기 그지없다. 그 깊이를 다 헤아리기에는 내 마음 그릇이 역부족임을 느낀다. 이는 어머니 사랑이 너무도 견고하고 깊기 때문이다.
  ‘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 날 리더 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생략)’ 어머니 노래를 들어온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 가수 심수봉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 있다. 비록 유행가 곡조지만 구슬픈 멜로디가 오랜만에 나의 오감을 자극한다. 어머니가 자주 애창했던 이 노래 제목은 ‘봄날은 간다 ’이다.
  어머니 젊은 날은 지금 생각해봐도 고통과 역경의 삶이었다. 아버진 그동안 사업 실패의 고배를 몇 번 마셨다. 그로인해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나를 음악 공부 시키느라 밤낮 없이 교육 사업을 하였던 어머니다. 낮엔 학원에서 아이들 강의를 도맡았고, 밤엔 아이들 논술 그룹 지도를 하면서 일 년 열두 달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쉰 적 없이 가족들을 부양 하느라 애써온 어머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슴 속 켜켜이 쌓인 많은 애환을 쏟아 냈을 엄마를 생각하니 왠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삶의 역경 속에서도 결코 흔들림 없이 항상 제 자리에 있었다. 요즘도 어쩌다 휴일에 집에 들르면 오랜만에 집을 찾은 나를 위하여 어머니는 부지런히 좋아하는 음식을 요리해 주느라 분주하다. 아직도 늘 부엌에서 일을 하는 어머니 뒷모습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 이다.
  어머니 노래는 지금도 변함없다. ‘봄날은 간다’ 이 노래를 입안으로 흥얼거리는 모습도 예전 그대로다. 어디 이뿐인가. 내가 힘들 때 나 슬플 때 그리고 기쁠 때에도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 묵묵히 자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미혼이어서인지 어머닌 변함없이 아직도 보호막이 돼주고 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은 가늠할 수 없이 끝없다. 자애로운 모습, 그 모습으로 언제 어디서든 꺼지지 않는 희망의 등불로 어머니는 영원히 내 가슴 속에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