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을수록 하늘은 더 높푸릅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발길이 저절로 밖으로 향합니다. 소금강산 언저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천천히 걸어서 박바위(瓢巖)를 거쳐 탈해왕릉까지 갑니다. 석탈해는 석(昔)씨로서는 처음 신라왕이 된 인물입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석탈해 설화로 유추하면 그는 본래부터 신라 사람이 아니라 외부 어딘가에서 유입된 집단의 일원이었지만 남해차차웅은 그의 장대한 기골과 남다른 지략을 인정하여 정사를 총괄하는 자리인 대보에 임명하고 사위로 받아들입니다. 탈해가 기지로 월성에 살던 호공(瓠公)으로부터 집을 빼앗는 이야기를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탈해가 어거지로 남의 것을 강탈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어느 날 탈해가 토함산에서 내려다보니 저 멀리 반달 모양의 낮은 봉우리가 썩 좋아보였습니다. 그러나 거기는 이미 호공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탈해는 집주인 몰래 주변에 숫돌과 숯을 묻어두고 호공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본래 대장장이였던 자신의 조상이 살던 곳인데 잠시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 호공의 조상이 그곳을 빼앗아 살았으니 이제 자신이 돌아왔으니 당연히 집을 돌려받아야 한다고 꾸며 말했습니다. 호공이 탈해가 말한 대로 집 주변의 땅을 파니 증거가 될 물건들이 나오므로 집을 돌려주었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남해차차웅은 탈해의 지략이 뛰어남을 알고 사위로 삼았습니다. 탈해가 차지한 월성은 신라의 왕궁터가 됩니다.   자신의 옛 조상이 살았던 땅이니 이제 돌려받아야겠다는 설화에서 연상되는 지역이 또 있지요.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지금 싸우고 있는 싸움의 뿌리도 그 전말이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은 경위와 어느 정도 비슷해 보입니다. 무려 2천년 가까운 세월의 디아스포라를 겪고 있던 유태인들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땅을 찾아 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필리스티아라 불리던 부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 자신들 조상이 살던 땅이었으니 그곳에 살고 있는 필리스티아인들(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그 땅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유태인들의 논리였지요. 사실 탈해는 왕이 된 후에 집을 빼앗겼던 호공을 불러 오늘날의 국무총리격인 대보에 임명함으로써 호공의 집을 빼앗은 댓가를 치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자치국가의 사이는 닭과 계란의 순서를 다투며 서로 상대방을 갈등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거기에 세계의 힘의 역학까지 연동되니 시간이 갈수록 두 집단의 갈등은 더 복잡한 양상이 되었습니다.   TV 뉴스 화면에 비친 가자 지구의 모습은 이미 폐허 그 자체입니다. 폭격으로 죽은 가족의 주검을 앞에 두고 비탄에 잠겨 울고 있는 시민, 인질로 잡힌 딸을 돌려달라고 호소하는 어머니의 절박한 얼굴, 폭탄이 만든 구덩이에 널린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멀리 떨어진 남의 나라 일 같지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도 아직 진행 상태인데 또 다른 무력충돌이 전쟁으로 치달음을 지켜보며 두려움이 왈칵 일어납니다. 폭탄이 평생에 거쳐 쌓아온 사람들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것은 한 순간의 일이지만,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는 또 평생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마치 땅 속에 지어진 개미굴이 소년의 심술궂은 발길에 짓이겨지면 갈팡질팡하며 흩어지는 개미떼들처럼 우리 인간의 삶도 대량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무력 앞에서 아무런 방패도 없이 나약하기만 합니다.   지난 주 짧게 나가사키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육지로 깊이 들어 온 오무라 만(灣)에 청량한 가을햇살이 만든 윤슬에 눈이 부신 바다에서 우리나라 다도해의 고요와 평화로운 아름다움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이런 고요와 평화도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한순간에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일본 군국주의의 무모한 야망이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동남부에 행한 만행을 응징하고자 함이지만,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 전시된 폭탄이 떨어지던 순간에 그대로 멈춘 시계, 어느 아이가 가지고 놀았을 망가진 장난감, 폭격 당일에만 7만여 명이 죽었다는 통계 자료 등은 피아(彼我)를 떠나 전쟁은 처참한 비극임을 상기시켰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나가사키 순방 후 2018년 연하장에 썼다는 한 나가사키 소년의 사진은 말 한 마디 없이도 전쟁은 그 자체가 거대하고 악랄한 범죄라고 웅변합니다. 폭격으로 죽은 동생을 업은 채 입을 앙다문 굳은 표정으로 죽은 부모의 화장(火葬)을 지켜보는 소년의 사진에 ‘전쟁의 결과’라는 멘트를 남긴 교황의 의도는 확고한 반전(反戰)의 입장을 드러내며 오늘날 고조되고 있는 핵전쟁의 위협을 비판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지구촌 곳곳에 일어나는 무력 충돌이 큰 전쟁으로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며, 세계 평화를 간구하는 교황님의 기도에 감히 나의 미약한 기도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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