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연결되는 인간관계이다. 이것은 내가 원해서도, 내가 택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이고 필연적인 관계이다. 태어나보니 내가 여기에 있고, 내 부모가 있고 내 형제들이 있다. 오직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것 들을 다른 말로 운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나는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 옛날, 아들이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시절의 삼대독자 집에 연년생으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얼마나 실망이 컷 으면 첫 딸을 안고 마당에서 서성이다가 딸을 낳았다는 소리에 “아이고, 너만 못할 짓 했구나” 연신 되 뇌였다고 한다. 그 당시는 우유도 없었던 시절이니 그럴 만하다.   그런데 또 세 번째도 또 딸이 나왔으니, 아들을 낳으려고 작은 부인을 얻는 것은 그 시대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 일수도 있다. 그 때문에서였는지 어려서 부터 내 기억 속에는 우리 부모가 싸우는 모습 밖에 없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날 부터는 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았고, 주말에 한 번씩 운전기사가 와서 우리를 아버지한테 데려가서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고, 만화책을 사 들고 집에 왔다.   이제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잘 살았던 것 같다. 그 시절에 자가용에 운전기사까지 거느리고 살았으니 말이다. 반면 엄마와 남매 넷은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며 버티다가 끝내 딸 셋은 아버지 집으로 보내졌다. 생활비를 보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막내아들은 그때 너무 어려서 엄마와 같이 살았다. 아버지 집으로 갔을 때, 난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후 5년간을 살다가 아버지가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엄마한테로 왔다. 가장 예민한 사춘기 때 그 여자(난 늘 그렇게 불렀다)와 살면서 혼자서 많이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마한테로 다시 왔지만 역시 행복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가족 간에도 화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난 내가 왜 하필 우리 집에 태어났을까하고 많이 생각했다. 다른 엄마, 아빠를 가진 친구가 부러웠고 엄마, 아빠가 함께 사는 집이 부러웠다. 우리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는 물론 미워했지만, 자식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엄마도 싫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짝이었던 친구하고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6년 만에 우연히 길에서 만났다. 그때의 기쁨은 말 할 수 없었는데 서로 약속이 있어서 급히 가는 길이어서 일요일 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일요일 날 아침, 기쁜 마음으로 엄마에게 그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커피 값을 달라고 하자 엄마는 “돈 없다” 하고 한 마디로 거절하고는 한 시간이나 울며 조르는 나를 끝내 외면하였다. 결국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 친구는 만날 수 없었다. 이제 생각하면 그때 커피 값이 없어도 약속장소에 나갔어야하는데 하는 후회도 된다. 끝내 커피 값을 주지 않은 엄마도 원망스럽다. 그 친구가 내게 얼마나 실망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가족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이며 필연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가족이 사랑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갈등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심각한 갈등은 흔치 않았던 것 같다. 예전에는 매스컴이 발달하지 못해서 우리가 몰랐던 것일까.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들리는 끔찍한 가족 간의 갈등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요즘 항간에 떠도는 말이 있다. 돈이 있는 부모는, 자식에게 돈을 조금 주면 쫄려서 죽고, 많이 주면 굶어 죽고, 안 주면 맞아 죽는다는 것이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뼈 있는 말이고, 우리가 어렵게 살던 시절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다. 세상은 우리가 어려서 읽었던 공상 과학만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놀라운 세상이 되었다. 게다가 없는 것이 없는 풍요로운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우리가 어려서 동화책에서 읽었던 ‘의좋은 형제’는 간데 온데 없고, 유산을 놓고 형제간에 소송을 벌이고, 돈 때문에 부모를 협박하고 돈을 다 가져가면 구박하고 구타하는 일 까지 벌어지고 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가족을 죽이는 일까지 있다. 그리고 통계에 의하면, 놀랍게도 부모를 학대하는 1순위가 아들이라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다.   며칠 전 TV에서 가족 간의 법적 소송에 대한 문제를 다룬 실화를 소개하였다. 아들이 홀로 사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시겠다고 해서 살고 있었던 집을 아들 이름으로 증여하고 아들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가족들은 아버지와 거의 말도 안하고 방치하다시피 하다가 얼마 후에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나가줬으면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아버지는 너무 기가 막히고 괘씸해서 증여했던 집을 다시 반환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변호사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증여할 때 부양을 전제로 증여한다는 각서가 있으면 가능하나 그런 조건 없이 증여한 것은 반환받기가 쉽지는 않다고 했다.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데 무슨 각서가 필요하며 그것을 미리 써 놓지 않으면 집만 뺏기고 그냥 내 쫓아도 아무 대책이 없다는 말인가. 형제간도 아닌 부모 자식 간에도 이런 소송이 있다는 현실이 너무도 슬프다.   세상은 참 편리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는데 사람들의 심성은 왜 악해져 만 가는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는 현대사회의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는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차이가 별로 없었다. 잘 사는 사람들이 쌀밥에 비단옷을 입고 산다면 못 사는 사람들은 보리밥에 무명옷을 입고 살았다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잘 살고 못 사는 차이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격차가 크다.   그 결과, 사람들의 가치관이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물질은 분명히 우리 인생을 윤택하고 편리하고 행복하게 해 주지만, 물질만으로 인생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물질은 단지 수단일 뿐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물질이 마치 인생의 목적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초월해서라도 잘 살아야겠다는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 같다.   또 하나는 자존심의 결여이다. 인간은 유일하게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물이다. 자존심은 자만심과는 다르다. 자긍심과 통하는 말이다. 자존심은 내 스스로 나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나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들이 손가락질할 짓을 하도록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하는 짓을 남들이 모를지라도 나 자신은 알고 있으니까 절대로 부끄러운 짓을 하게 놔 둘 수가 없는 것이다.   잘못된 가치관의 형성은 결국 올바른 자존심의 형성을 방해한다. 이러한 인격의 기초는 가정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학교교육, 사회교육 모두 중요하지만, 올바른 가치관을 길러주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다’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음미해야할 가장 시급한 시대적 과제가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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