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살상전쟁이 치열한 때에, 지난 10월 22일 대한민국ROTC경주지회(회장 이진택)에서 문화유적 심방행사를 가졌다. 이날은 경주중고등학교총창회에서 매년 갖는 등반을 비롯한 여타 행사가 많아서 회원 다수가 참가하지 못했으나 30여명의 참가회원은 정다운 만남을 가졌다. 특히 먼 영주시에서 3기 선배(권태림)를 비롯한 외지 출신이 축하차 동행해 주어서 더욱 의미 깊은 행사가 되었다.
 
월정교 앞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도당산, 월암 김호(金虎) 장군 생가 사당, 육부전, 숭덕전을 거쳐 다시 월정교주차장으로 돌아오는 도보로 약 2시간 소요되는 코스였다.
  계획된 코스 모두가 유서 깊은 사적지였으나 도당산과 김호장군 생가 고택과 사당에서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육부전은 생략하고 숭덕전은 외곽만 거치게 되어 아쉽게 되었다.
 
도당산은 신라 내물왕릉(奈勿王陵)과 경주향교가 마주보고 있는 금오산의 한 지령으로 표고 95m의 비교적 낮은 독산이다. 일명 돛대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도당산(陶唐山)이라는 말은 중국의 요순(堯舜) 임금과 같이 신라에서도 박⦁석⦁김 3성(姓)이 이곳에서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기인한 명칭이라는 것이다. 요순의 덕을 행한 곳이라 하여 도당씨(陶唐氏: 舜)의 ‘도당(陶唐)’을 따서 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도당산(陶唐山)이라기보다는 도당산(都堂山)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권오찬, 2005)고 보는 견해가 있다. 도당(都堂)이라는 것은 도당정치를 말하는 것으로, 신라시대의 도당이 바로 여기였던 까닭에 도당산이라는 산명이 생긴 것이며, 이 말과 제도는 고려시대까지도 존속되었는데 중신들이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 산 옆에 속칭 왕장골(王井谷)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에 왕정(王井)이라는 샘이 있어서 왕정곡(王井谷)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왕정(王井)은 왕이 사용하던 우물이다. 왕정(王井)은 이곳에서 왕을 모시고 정사를 논하는 즉, 왕정(王政)과 관련해서 생긴 지명이다. 그래서 도당산은 그 유래가 의미 깊은 산이다.
도당산은 근래에 신라 화랑이 남산으로 내왕하던 길을 등산하기에 편리하게 다듬어 놓았다. 도당산을 내려오면 서쪽에 월남(月南)들과 귀야(鬼野)가 넓게 보인다. 월남들은 반월성 남쪽에 있는 들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고, 귀야(鬼野)는 진지왕의 혼령과 도화녀(桃花女) 사이에 태어난 비형(鼻荊)이 심야에 귀신과 놀았던 들이라는 것에서 구드리, 귀들, 귀야, 귀호평 등으로 불러오는 이름이다.
  도화녀는 미색의 유부녀였기 때문에 진지왕의 청을 ‘여지소수(女之所守)는 불사이부(不事二夫)라’하여 거절하였으나, 부군 사후에는 가능한가의 물음에 대해 ‘그때는 듣겠나이다.’라고 답하여 궁중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2년에 진지왕의 혼령이 갑자기 나타나서 청하기에 어쩔 수 없어서 관계를 맺고 옥동자를 낳았다. 진평왕은 선왕이 낳은 이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 키웠는데 15세 때 벼슬을 내렸으나, 밤이 되면 궁중을 빠져나가 들에서 귀신들과 놀다가 새벽에 궁중으로 돌아오는 이상한 행동을 하였다. 그래서 비형이 귀신들과 놀았던 들이라 하여 방언으로 구드리, 혹은 구들, 귀들로 오늘날까지 불러오고 있다.
  월암 김호장군의 생가 고택은 도당산 끝자락을 지나서 남쪽으로 약 1km쯤 지점에 식혜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월암공은 이곳에서 1534년에 태어났다. 37세 때인 1570년에 무과 급제하여 10여년 봉사로 복무하고 사직하였다. 이곳에서 집을 지어 월암(月菴)이라는 편액을 문미에 붙이고 후학을 가르치며 임천에서 유유자적 하던 중 1592년(임진) 4월 13일에 왜군이 대거 침입하여 14일에 동래성이 함락되고 21일에 경주성이 함락되었다. 살상과 약탈을 자행하므로, 서사어적을 다짐하며 창의 거병하여 남도대장으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왜적을 소탕하여 혼자 39급을 베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래서 부산첨절제사의 교지를 받았으나 부임을 미루고 계연전투에서 잔적을 소탕하던 중 적탄에 상해를 입고 청년의병 최진립에게 통수권을 물려주고 애석하게도 순절하고 말았다.
  영조 무인년(1758년, 영조34년)에 형조참판에 증직되어 남강사(南岡祠)에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위해 훼철(毁撤)되어 복원하지 않아서 향사(鄕祀)를 봉행하지 못하고 사당에서 제사를 받들어 오고 있다.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유적이 없을까 만은 경주는 타 지역에 비해 사적이 많은 편이다. 무심코 지나 칠 것이 아니라 선현(先賢)들이 보국위민을 위해 목숨 받친 사적을 살펴보는 것은 후학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해 볼 때, 대한민국ROTC경주지회의 이번 유적지 심방행사는 단순한 걷기 운동이 아니라 문화유적에 담긴 선현의 충의지심을 살펴볼 수 있는 의미 깊은 행사였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