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나 가문 및 국가는 각기 지나온 자취를 문헌에 기록하거나 돌에 새겨 후세에 전해왔다. 오래 전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단단한 돌에 새겼으나 그것도 전란과 천재지변으로 파손되고 소실되어 흔적 없이 사라진 경우가 허다하여 조상의 내력을 알고 싶은 후손들에게 안타까움이 되어 왔다.
특히 신라시대의 경우는 고려조를 거처 조선조에 오기까지 숱한 각종 외침에 의해 병선을 입게 되어 선대의 산소와 내력이 실전되어 현조의 사적을 소상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어서 잘못 파악된 것이 더러는 성손 간에 간혹 시비의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그래도 옛 조상은 묘비만이 아니라 묘지명(墓誌銘)을 새겨 산소 곁에 묻어서 사적이 세세영영(世世永永) 전승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묘지명은 묘지에 대한 명문(銘文)이다. 죽은 이의 덕과 공적을 글로 새기어 후세에 영원히 전한다는 뜻을 지닌 글이다. 죽은 이의 성씨, 관직, 가족 사항, 고향 등을 기록하는데, 이를 '지(誌)'라 하고, 죽은 이를 칭송하는 글을 적은 것을 명(銘)이라고 한다. 보통 정방향의 두 돌에 나뉘어 새긴 뒤에 포개어 무덤 속에 넣은 것을 묘지(墓誌)라 한다.(naver)
 
'경주김씨학수공파세보'에 의하면, 조선조 둘째 임금인 정조 8년(갑진, 1784년)에 우의정(右議政) 김사목(金思穆)공이 송악산 종암 언덕에서 우연히 세 개의 지석(誌石)을 발견했다. 은열(殷說), 황(湟), 경순왕의 7세손 검교태자소보 김경보(金景輔)의 묘지(墓誌)가 그것이다.
경순왕은 신라를 고려 태조 왕건에게 양국하고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와 재혼하여 5남 2녀를 출산하였는데, 그 서차는 은열(殷說), 석(錫), 건(鍵), 선(鐥), 추(錘)이며 녀(女)는 각각 황경, 이금서에게 적(適)하였다.'고려사절요' 제1권에 보면, 태조 신성대왕 18년 을미(935년) 11월 계축일에 왕은 정전(正殿)에서 문무백관을 모아 놓고 장녀 낙랑공주를 귀부(歸附)한 신라왕에게 시집보내는 혼례식을 거행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된다.(高麗史節要 卷之一 太祖神聖大王 18年 乙未 11月 癸丑 王 御正殿 會文武百官 備禮 以長女樂浪公主 歸于新羅王)
 
은열공은 경순왕의 제사자(第四子)이고 관이 시중시랑 평장사이며 보국대안군에 봉(封)해졌으며, 무진 3월 4일에 졸하였다. 경순왕의 아들 서차에 대해 의문이 없지 않았으나 다행스럽게도 대안군묘지석이 발견되어 그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었다고 할 것이다. 삼가 그 일면을 살펴보니 왈(曰)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 아들은 시중시랑의 벼슬을 지냈고, 고려에 평장사를 지내신 휘 은열(殷說)로써 무진년 3月 4日 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북 10리 바깥 종암 아래 오룡산 남쪽 기슭 쌍룡합곡 임좌 언덕에 안장하였고, 형은 일(鎰)과 황(湟)·명종(鳴鍾)이요, 아우는 중석(重錫)·건(鍵)·선(鐥)·추(錘)라고 적혀 있다.
이 묘지명은 신라 경순왕 가계의 서차(序次)를 명증하는 대단히 고귀한 자료이므로 다음과 같이 후손 우의정 김사목이 근기(謹記)한 '대안군김공은열묘지명(大安君金公殷說墓誌銘)'을 다시 여기 삼가 기록하니 문명사적 인지에 참고가 되기를 바라고자 한다. (大安君金公殷說墓誌銘: … 謹按其一面曰 新羅敬順王金傅 第四子侍中侍郞 有高麗平章事殷說卒于 戊辰三月初四日 己丑 葬于 城北十里 鐘巖下五龍山南麓 雙龍合金 壬坐之原 兄則鎰 次湟 次鳴鍾 第曰重錫 曰鍵 曰鐥 曰錘 子江陵君 泰華後其子孫者 或有昭考之意 採誌於自墓上正北五步之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