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출산장려 공익광고를 듣다가 문득 내가 지나온 성상(星霜)도 제법 되구나 하는 감상에 빠졌습니다. 변하는 시대에 따라 가치 기준이 달라지고 달라지는 기준에 맞추어 우리 삶의 양상이 재단되는가 봅니다. 역사를 거슬러가며 살펴보더라도 시대마다 이상적인 사회의 전형이, 삶의 신념이, 도덕적 기준이 다르고 그 다름이 수많은 내전과 외환을 불러왔고 그러면서도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요즈음 심각하게 대두되는 저출산과 인구소멸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밟아온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적 요구가 변해왔고 그에 발맞추어 사회적 가치가 설정되어왔습니다.
  6.25전후 세대인 나의 또래들은 대부분 형제자매가 너댓 명 이상은 되었습니다. 심지어 아홉이나 열이 되는 경우도 있어서 그런 집의 맏딸은 자기보다 늦게 난 동생들을 업어서 기르기도 했지요. 일곱이나 되는 형제자매 중 막내 바로 윗자리 서열이던 나도 딸 다섯 중 맏딸인 큰언니의 등에 업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감기를 달고 살다시피 하던 내가 열에 들떠서 괴로울 때 일부러 밖에서 찬 공기를 맞고 온 언니가 나를 등에 업고 서늘한 옷자락으로 열을 달래주던 기억, 그럴 때 언니의 등은 엄마의 등만큼 편했습니다. 겨울밤에 다섯 자매가 한 방에 자면서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이불을 잡아당기던 것도 지금은 재미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반찬으로는 김치와 된장찌개가 전부지만 큰 두레반에 둘러 앉아 자리싸움으로 밀치고 당기며 먹던 아침밥에 대한 기억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는 동네마다 타작과 같은 동네 공동의 일을 위한 큰 마당이 있었는데 동넷일이 없을 때 그곳은 아이들의 놀이터였습니다. 끼리끼리 패가 되어 말타기 하는 머스매들, 사방치기, 고무줄놀이에 한창인 여자아이들, 비석치기, 딱지치기에 정신이 팔린 아이들로 동구마당이라고 부르던 그곳은 늘 시끌벅적했습니다. 저녁밥을 먹고 어둑신해지면 ‘순경과 도둑’이라고 이름 붙인 술래잡기에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다니곤 했습니다. 어느 동네를 가든 함께 개구지게 놀 아이들이 없는 동네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국민학교(초등학교의 당시 명칭)에 입학했고 학교 숙제로 종종 부과되던 간첩 신고나 화재 예방 포스터 그리기 숙제에 어느 때부턴가 산아제한 포스터 그리기가 추가됐습니다. 전쟁의 와중에 속절없이 죽어간 목숨들을 대신하듯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 출생률은 폭발하듯 늘어났고 많은 자녀를 양육하느라 가난을 벗어나기가 퍽이나 어려웠습니다. 당시 심각한 사회문제인 가난을 벗어나는 방도로 정부는 ‘아이 적게 낳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며 권장했습니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는 전신주나 담벼락 곳곳에 붙어 있어 저절로 외어지던 문구입니다. 80년대가 되면서는 ‘둘도 많다, 하나 낳아 잘 기르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로 바뀌며 자녀의 수를 더 줄이도록 계도하며 동시에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는 출산을 계속하던 뿌리 깊은 남아선호 의식을 계몽하고자 하였지요. 그러던 세월이 그리 오래지 않은데 요즘 내가 사는 아파트만 하여도 놀이터에 매달려 노는 아이들은 없고 빈 미끄럼틀, 빈 시소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쓸쓸해 보이기만 합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입학식 날 입학하는 어린이가 몇 명 되지 않으니 휑뎅그레한 장면을 보이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라는군요. 오늘 아침 들은 출산 장려 캠페인의 멘트가 오륙십 년 전의 기억 속의 요란하던 구호들에 오버랩되됩니다. ‘새벽에도 아기를 돌보느라 잠을 설쳐도 방긋거리는 아이 웃음에 행복해지는 아이러니’로 고생스럽지만 부모가 되어야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을 이야기하며 ‘아이러니’를 ‘아이러니’로 변형시킨 언어유희의 멘트가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자녀 출산, 양육과 교육의 패턴을 깊이 분석하고 연구하여 합리적이며 지속가능한 출산 장려 정책과 제도 마련이 우선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대표적 저출산국가였던 프랑스의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해 출산과 양육, 그리고 교육에 대한 정책을 출산육아 지원 시스템으로 통합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드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불임치료에 드는 경비를 국가가 모두 지원하고 출산 후 부모 누구나 육아휴직이 가능하며 국립탁아소와 직장 내 양육보조원 창설을 정책적으로 지원해서 육아의 어려움을 국가가 분담했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무상으로, 대학을 가도 실질적으로 무상에 가까운 비용으로 사실상 국가가 교육을 책임지며 둘 이상의 자녀가 있는 가족은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양육수당을 지급하는 등, 출산문제를 국가차원에서 관리하며 문제를 극복해냈다고 합니다.
사실 유럽의 출산률 감소는 여성 인권이 향상되면서 피임법이 발달하고 여성의 사회활동 증가, 여성의 몸에 대한 주체적 인식 등으로 인한 자연적 감소로 본다면, 우리나라나 중국의 경우는 정부의 개입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자녀수를 국가가 일방적으로 조절하고 다자녀가구에는 불이익을 부과하는 동안 아들이 아닌 딸들은 태아인 상태로 죽음을 당하는 낙태의 제물이 되는 경우가 음성적으로 늘어갔습니다. 이런 현상은 물질주의로 인한 생명 경시 풍조를 가속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요? 지금 인구절벽에 맞닥뜨린 정부는 다급하게 출산 장려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제도적 지원을 갖추고 시행함과 아울러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정신적 계도도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엄연한 하나의 생명으로서 태아의 권리를 인식시킬 교육적 방안도 포함되기를 바라봅니다. 타의에 의해서 자식을 ‘낳지 않아야 하고 / 더 낳아야 하는’ 상반된 두 가치가 기껏 60년밖에 안 되는 시간 안에 공존하는 것도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