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팝나무가 쌀밥같은 꽃을 가득 피웠습니다. 대릉원 옆 길을 따라 이어지는 이팝나무 가로수들이 하얀 꽃송이를 만개하여 벚꽃이 피었을 때와는 또 다른 운치를 만듭니다. 일전에 보름 정도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니 베란다에서 키우던 식물이 말라죽은 것이 여럿 보였습니다. 물 줄 시기를 넘겨서 목이 말라 죽었나 생각하니 죽은 식물들에게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 중에도 키가 자그만 초화류가 해를 제일 많이 입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물을 여러 번 주어도 회생하지 못하고 결국 말라죽고 맙니다. 어쩌면 나는 ‘식집사’로는 한창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식집사’라는 신조어를 들어보셨나요? 반려동물로 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이 고양이의 도도한 성격에 키우는 이가 맞춰가야 한다고 해서 스스로 고양이의 집사라고 우스갯소리로 지칭한 말이 ‘집사’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반려동물이라는 말뿐 아니라 반려식물이라는 말도 생겨났습니다. 개나 고양이같은 반려동물에게 하듯이 식물에게 이름도 붙여주고 출퇴근할 때마다 인사도 나누고 오늘 하루 힘들었던 일도 나누며 식물이 하루하루 자라는 것에서 보람과 위로를 얻는 사람들이 늘고 있답니다. 그렇게 기르는 식물을 반려식물이라 하고 자신을 ‘식집사’로 지칭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할 역할을 동물이나 식물에게 일부 맡긴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과 SNS의 등장으로 우리는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정보가 넘쳐나고 소통이 활발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상사 하나하나를 SNS로 타인들과 공유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고립과 단절로 인한 외로움은 오히려 더 커지기만 합니다. 소통이 활발하게 열려있지만 진정한 소통이 부재하는 모순된 사회 속에서 현대인은 외롭다고 느끼며 정신적 아노미에 빠집니다. TV, 일인방송, 영화같은 자극적인 미디어에 염증이 나거나 혼자 있으면서도 위로받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게 되면서 식물에게 관심을 돌리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중년의 영역이라 여기던 식물키우기가 MZ세대의 새로운 취미로 떠오르게 되나 봅니다. 특히 집을 떠나 혼자 생활하는 젊은이들이 반려식물이 애정을 기울일 대상이 되면서 낯선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던 외로움을 해소할 수도 있고 정서적 안정도 얻는다고 합니다. 또한 기계화되고 일방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실존적 소통이 부재하고 자신을 거대한 기계의 작은 부속물 하나로만 느끼는 현대인은 키우는 식물이 생장하고 꽃피우는 과정에서 성취감과 위로를 얻습니다.
  ‘반려(伴侶)’라는 말은 원래 ‘인생을 함께 하는 자신의 반쪽 짝’이라는 뜻으로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물보호단체가 애완동물이라는 명칭을 반려동물로 부르면서 이제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신과 일상을 함께하는 동식물에게도 반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애정을 주지만 상대적으로 애정을 요구하기도 하며 끝까지 책임질 의무를 가져야 할 반려동물에 비해 반려식물은 능동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없기에 키우는 심적 부담이 덜하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이 반려식물을 선호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책임지지 않고 구속되고 싶지 않아서 결혼을 기피하는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관이 키우고자 하는 동식물에도 적용된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는 인간 각 개인들의 행위가 초래한 사항이 인간으로부터 분리되고 주체가 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소외현상을 초래한다면서 자본주의를 비판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경제 철학은 실패했으나 그가 언급한 철학적 소외는 현대인이 겪는 엄연한 현상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들의 경제를 책임지고 매일 지겨운 외판원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아침 자신이 벌레로 변한 것을 발견합니다. 가족의 경제를 걱정하는 그와는 달리 가족들은 그를 단지 징그러운 벌레로 보고 이웃에게 알려질까 기겁하며 그를 방 안에 가두고 자기들만의 삶을 구축합니다. 가족에게 잠자는 경제적 가치로만 존재가 허용되다가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가족들은 그를 가족의 범주에 소외시킵니다. 현대 사회의 소외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가족 관계에서조차 그러하다는 의미로 읽힙니다.
  인간은 인간이 발전시킨 물질문명 안에서 기술의 도움으로 편해지기는 했지만 진짜 소통의 부재 안에서 처절하게 외로워집니다. 하지만 애정과 이해를 나누고 참된 소통 안에서 위로받고자 하는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니 동물에게, 식물에게 외로움을 기대어 보려 하지만 그것 또한 일방적인 소통이라는 모순이 있습니다. 진짜 우리가 원하는 소통은 누구와, 어떠한 형태의 것일지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