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런데 비단 위급한 상황에서 뿐일까? 예전에 그 헐벗고 굶주리던 시절에도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매우 소중히 여겼었다. 논두렁 밭두렁을 따라 뚝 뚝 떨어져 살아도, 이웃집의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비밀이 없었고, 누구 집 어른 생신, 누구 집 제삿날, 누구 집 잔치 등 길흉사를 함께 겪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좁은 공간에 포개져 현관문을 마주 보고 살면서도 이웃집 주인의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고, 아래윗집 층간 소음 때문에 서로 싸우고 원수처럼 지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조선시대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오던 우리 대가족 문화가 어느 때 부터인가 부부를 중심으로 한 핵가족 형태로 바뀌면서, 주거문제, 교육문제, 육아문제 등은 물론이고,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극에 달하면서, 이웃과의 관계도 자연 소원해 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다.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개인의 삶이 가장 소중하지만 무인도의 삶이 아닌 이상, 사람은 홀로 존재하기 어렵고, 다른 사람들과의 이런 저런 관계 속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내 가족이 소중한 이유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공간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물질적 정신적 공유부분이 많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이웃은 누구이고, 그들은 나의 삶과 어떤 관계일까? 가령 우리 집에 화재나 기타 응급상황이 발생되었을 시, 119나 경찰을 부를 수도 있고, 친척에게 연락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만큼 빨리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일까? 우리 삶을 통 털어 이웃이란 멀리 있는 친척이나 심지어 독립한 자식들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공유해야 할 것들이 많은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때 부터인가 이웃과의 관계를 잊어버린 채, 모두가 자폐적인 삶을 살면서 고독한 인생에 병들어 가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요즘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무슨 동호인 클럽활동 들을 하기도 하고, 또 이런 저런 모임들에 가입하여, 다양한 커뮤니티를 가져보려 애를 쓰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어떤 이해관계나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끼리끼리 모인 사람들은 같은 목표를 지향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인 경우가 많고, 때로는 그 모임을 주도하는 특정인의 이용물이 되어, 시간과 돈만 낭비하는 소모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아무튼 인간이란 홀로 존재하기에는 너무도 불안하기에,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져보려 하는 것인데, 굳이 그것을 멀리서 찾을 것은 없을 것이다. 우선 공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과의 관계가 원만하면, 이웃 마을과 가까워 질 것이며, 이웃 마을이 가까우면, 이웃 지역과 가까울 것이요, 이웃 지역이 서로 가까우면 온 나라가 하나임을 알게 된다.이웃은 남이 아니다. 이웃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며, 이웃과 담장을 허물면, 더 넓은 공간을 공유하게 되고, 공간을 서로 공유하면 자연히 마음도 가까워지게 마련,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성경말씀이나 '원친불여근린'(遠親不如近隣)이란 말이 서로 다르지 않다. ‘원친불여근린’의 뜻을 잘 이해하면, 이웃을 이롭게 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이 풍요로워 진다.하기에 나는 그 어떤 만남보다도, 비 오는 날 마루에 걸터앉아 이웃과 막걸리 한 사발이나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