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울고, 웃는 것인데 고통 없는 인생이란 없다.’ 미국의 모파상이라 불리는 소설가 ‘오 헨리’의 말에 상응하는 필자의 젊은 날이 있었다. 역경 없는 인생이 어디있으랴마는 그 고비를 넘기기엔 인내심이 역부족인 게 사실이다.   지금도 사과만 보면 괜스레 눈가가 젖는다. 유별난 입덧 탓이었던가. 과일 가게에 진열된 먹음직스런 사과를 실컷 먹는 게 절실한 소원인 적이 있었다. 당시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일이다. 울산 모 대기업에 근무하던 남편은 직장 노조 운동에 앞장섰다. 평소 정의롭고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향이 그를 노조 운동 앞잡이로 내 몰은 것이다. 그 여파로 잘 다니던 직장으로부터 권고 해직을 당했다. 그 후 일정한 직업 없이 집에서 빈둥대던 남편의 무능은 피폐함마저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임신을 했으나 먹고 싶은 사과 한 알 선뜻 사먹지 못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   눈물을 머금고 울산을 떠나서 겨우 달세 방 한 칸 얻을 처지로 시작한 타향살이였다. 두 식구 입에 풀칠조차 제대로 못하는 형국이었음에도,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쓴 결혼이기에 차마 친정에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손위 시누이가 매달 얼마간의 생활비를 보태주었다. 하지만 두 식구 연명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이러구러 산월이 다가와 나는 첫딸을 낳았다. 그 후 형편은 더욱 악화 돼 그동안 시누이가 보내주던 얼마간의 생활비마저 끊어졌으니. 이젠 방세도 못내 산모의 몸으로 거리에 내쫓길 신세가 되었다. 생각다 못한 남편은 무작정 길을 떠났다. 친구가 경북 영천에서 건축 일을 하는데 그가 하는 학교 보수 일에 일꾼이 필요하다는 말 만 남긴 채였다.   그곳에서 노동일이라도 하여 생활비를 보내겠다는 남편 말을 필자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집 떠난 남편은 한 달이 훨씬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난 갓난아이를 가로 업고 경북 영천 땅을 찾았다. 그곳을 이 잡듯 뒤졌다. 허나 어디에도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발길을 돌려 찾아간 곳은 시댁이었다. 남편은 그동안 이곳저곳 방황하다가 끝내는 그곳을 찾아 하루하루를 술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무심한 사람. 아무리 현실이 버겁기로서니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다니. 시댁에서 남편을 보는 순간 나는 그만 아이 업은 처네에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지난 세월, 모진 세파를 함께 헤쳐 온 필자의 눈물로 얼룩진 처네를 볼 때마다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저려온다. 아직도 장롱 속에 그것을 고이 모셔둠은 나만의 구닥다리 세간에 대한 애착만은 아닌 성 싶다. 이젠 고인이 된 목성균 수필가의 저서인 『명태에 관한 추억』에도 「누비처네」라는 작품이 있다. 글 행 간 행 간 마다 작가의 올곧고 덕망 있는 인품이 한껏 배여 있다. 이 분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필자의 헛된 허욕을 호되게 일깨우는 듯하여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분은 오로지 꼿꼿한 선비 정신으로 글을 쓴 작가여서 더욱 존경스럽다.   또한 작품 편 편마다 그분의 인간적으로 로맨틱한 면모도 발견하게 된다. 젊은 날 저자는 인쇄업을 운영하느라 임신한 아내를 고향에 두고 일에만 전념했다. 손녀딸이 태어난 지 백일이 넘도록 고향집을 찾지 않는 아들에게 저자의 아버진 손녀의 처네를 사올 것을 당부하며 서신 속에 소액환을 동봉해 보냈다.   아버지 명을 이행한 저자는 처네를 사들고 단숨에 고향집으로 달려갔으리라. 저자는 고향에서 추석을 쇤 후, 처가에 근친을 갈 때 달빛에 젖은 들길을 처자식과 호젓이 거닐게 된다. 그때 남자로서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았다고 그는 술회했다. 이 내용에선 지난날의 내 남편과 저자와 솔직히 비교되기도 했다. 남편은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행복함을 느끼기보다 가족에게 당면한 호구지책을 힘겨워 하지 않았던가. 아내의 등에 업힌 딸아이가 토해내는 맑은 웃음소리에서 저자는 아비로서 뿌듯함, 사랑스런 아내 남편으로서 의무감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이 분은 지난날 누비처네가 당신 인생을 연출한 소도구라고 표현 하였다. 지난 필자 인생사의 아름다운 소도구도 어쩜 지금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한 처네가 아닐까 싶다. 하여 삶을 살며 까닭 없이 마음이 헛발질 할 때면 그것을 꺼내 내 마음자락에 살며시 둘러보련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