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잊고 있던 책을 한 권 꺼냈습니다. 읽어야지 하면서도 책의 두께가 부담이 되어 오랫동안 미뤄두었는데 그저께 문득 그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 추장들의 연설을 모아 엮고 우리나라 작가가 해설을 달았습니다. 인디언이란 말은 이제 미국 현지에서도 쓰지 않는 말이 되고 대신 아메리카 원주민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더군요. 인디언이란 말이 담고 있는 부정적, 차별적 시선 때문이라 하지만 부정적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은 그 말이나 이 말이나 별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 연설문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시애틀추장이라고 알려진 수콰미시족 추장의 연설입니다. 시애틀이라는 미국 북서부의 도시 이름이 바로 그 추장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합니다. 이 연설은 1854년 미국 정부가 수콰미시족과 두와미쉬족을 그들이 원래 살던 땅을 떠나 강요된 보호구역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보낸 관리 앞에서 행한 연설입니다. 
 
이 연설이 많이 알려진 것은 힘에 밀려 보호구역 안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지만 굽히지 않고 당당한 그의 굳건한 태도와 원주민들이 자연을 대하는 관점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인간이 정복하고 그로부터 필요한 혜택을 얻어낼 대상이라 여기던 백인 이주민들에 비해서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며 자연 속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며 살았던 원주민들의 가치관이 확연하게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청교도 혁명 이후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이 점차 수가 불어남으로 개척지도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확산됩니다. 이 과정에서 백인들은 자신들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우월한 무기로 원주민들을 살해하고 또 군대를 보내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영국에서 도피해 온 청교도인들이 자리를 잡기 전 굶주리고 추위에 떨 때,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경작할 땅과 곡식 씨앗도 나눠 주며 이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점차 세가 커져 가던 백인들의 탐욕은 한계가 없었습니다.
  백인들은 총 몇 자루, 곡괭이 몇 자루를 주며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사고자 했으나 원주민들의 삶의 철학에 의하면 대지는 사고팔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백인들도 원주민의 대지를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땅 사용이 허용된 백인들은 땅에 울타리를 둘러 경계를 짓고 그것을 넘어오는 원주민들을 가차 없이 총으로 쏘아 살상했습니다.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또 하나의 무기는 백인들이 옮겨 온 전염병이었습니다. 낯선 전염병에 면역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던 원주민들은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어서 많은 인디언들이 백인이 옮겨 준 병으로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영역을 확장하여 거대 세력이 된 백인들은 이제 자기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되어 오히려 원주민들을 살던 땅에서 몰아내어 ‘인디언 보호 구역’이라는 이름만은 그럴 듯한 척박한 땅으로 몰아넣어 가두었습니다. 아이들 놀이에서 땅 위에 금을 그어 넘어오지 못하게 하듯이요.
 
그런데 시애틀추장의 연설문을 읽으며 깊이 감명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 그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은 세상 만물을 형제자매라고 보았으며 대지는 이 형제자매들의 어머니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에 몸붙여 사는 사람과 식물과 동물들은 모두 긴밀하게 하나로 이어져 있는 같은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미국인들이 대지를 사고파는 물질적 존재로 인식하는 데 비해 원주민들은 대지의 숨결인 공기 또한 대지의 일부분인데 그 공기를 어떻게 팔 수 있는가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백인들은 땅을 파헤치고, 건물을 세우고, 나무들을 쓰러뜨려 도시를 만들지만, 그래서 행복한가고 되묻습니다. 
 
도시를 건설하느라 가득한 소음과 생활의 악취에 무감각한 백인들에게 이런 식으로 대지를 파헤치고 더럽힌다면 언젠가 당신들은 폐허에서 숨이 막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들판에 가득하던 야생동물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덤불 숲도 사라지고 들판에는 전신줄이 어지럽게 널려있지만, 들짐승들이 어두운 기억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면 인간의 영혼도 깊은 고독감으로 말라죽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짐승에게 일어나는 일은 똑같이 인간에게도 일어난다.’라고 오늘날 우리가 처한 환경의 위기를 예언합니다.
  기술의 발전과 정보 사회의 실현이 인간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지구 환경은 인간을 위해 무한정 소모되었고 서서히 황폐해져 그로 인해 일어나는 자연의 이변들을 우리는 이제야 보게 됩니다. 대기 중 탄소량의 증가로 발생되는 기상 이변, 빙하와 영구 동토의 해빙, 바다 수위가 높아지면서 존망의 갈림길에 선 섬나라들...... . 애초에 시작은 아주 미소(微小)하였으나 이제 인간이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문명의 반작용은 커져버렸습니다. 자연이 병들면 자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인간도 병이 드는 것은 자명한 결과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오래 된 격언 하나를 소개합니다. ‘대지를 잘 돌보라. 우리는 대지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로부터 잠시 빌린 것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돌려주어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