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번지에 가면 고려시대의 명장 윤관장군의 묘가 있다. 그는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의 5대손이고,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했지만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숙종(1104년) 때 변방을 침범한 여진족을 몰아내어 영토를 확장하고 동북 9개 성을 축조한 인물이다. 윤관장군은 1111년 5월에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는데 조선조 중반에 이 묘를 실전하게 된다.    그 이유는 조선조 연산군이 이 지역을 사냥터로 정하다 보니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바람에 그 후로 묘를 실전하게 되었다는 설과, 중종의 처남 윤원형의 폭정으로 그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로부터 도굴의 위험이 생기자 묘소의 봉분을 헐어 평장으로 만들어 놓았기에 실전했다는 2가지 설이 전한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1763년 장군의 후손들이 그의 묘소를 찾던 중 조선 효종 때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의 묘소 아래에서 윤관장군의 시효인 ‘문숙공’이라 적힌 비석 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1764년 <조선왕조실록> 6월 14일자 기록을 보면 윤관 장군의 묘에서 확인된 비석의 조각을 통해 윤관 장군의 묘라는 것이 확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전된 사이 윤관 장군의 묘 뒤로 청송 심씨의 묘역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파평윤씨 문중에서는 바로 위에 역장을 한 청송심씨와 산송을 벌이게 되고 지방관아에서 해결이 되지 않자 조정의 영조 임금에까지 보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파평윤씨나 청송 심씨 모두 왕비를 배출했던 명문가였다는 점에서 가문의 자존심 대결로 이어졌다. 조정에까지 알려진 이 다툼은 영조의 중재에도 해결이 되지 못하고 250여 년간이나 더 이어지다가 근래 들어 2005년 윤씨 문중에서 땅 2,500평을 증여하기로 하여 심씨 문중에서 묘를 이장해 가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2005년 손학규 경기지사 당시 이장이 허락되지 않아 또 미루어지다가 2007년 김문수 경기지사의 도움으로 완전하게 해결이 되었으니 250년 동안의 기나긴 산송분쟁이 마무리되게 되었다.    윤관장군의 묘소 주변 곡장을 보면 다른 묘와 달리 유달리 높게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뒤쪽 청송 심씨 묘소의 앞쪽 조망을 막기 위해 고의적으로 쌓은 행위로 그 당시 감정으로 인한 산송분쟁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파평윤씨 가문은 이 묘소의 음덕으로 왕비 4명이 나오고 묘 바로 뒤에 심 씨의 묘를 쓰자 또 심씨 문중에서도 왕비 3명이나 나왔다. 이 묘소의 산세는 주산인 박달산(369m)에서 서북쪽으로 내려오다 다시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혈장 뒤 둥근 금형체의 현무봉을 만들었다. 현무봉 아래로 뻗어 내린 지맥은 과협을 하고 다시 길게 뻗어 내려와 유혈의 혈장을 만들었다. 혈장 뒤편의 과협은 그 아래에 진혈이 맺혀 있다는 증거가 되고 좌우 청룡·백호는 혈장을 잘 환포해 장풍국(藏風局)을 이루고 있다. 주변 산세는 모두 부드러운 귀인봉이고 특히 안산은 혈장 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당배 안산으로 혈장의 기운을 잘 막아주고 있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진 아미사는 그 모양이 아름다운 여인의 눈썹과 같아 후손들에게 왕비와 같은 귀인의 배출을 미리 예견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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