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라는 용어는 연애와 편지가 합성된 말이다. 연애라는 것은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뜻하고, 편지는 상대방에게 자기의 의사를 통하기 위한 사문서로서 서간, 서한, 서찰, 서속(書束)이라고도 한다. 두 단어가 갖는 뜻을 정리해 보면 남녀가 서로 사랑할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보내는 간절한 애정이 담긴 간찰(簡札)이다.
  이 연애편지는 이메일이나 휴대전화 등의 전자매체가 등장하기 전에 주로 사춘기의 젊은 세대들이 이용한 목적성을 갖는 비노출적(非露出的) 통신수단이었다.
 
자기가 가진 이성에 대한 애정을 담은 내용을 작성하여 보내기 위해서는 사연의 기획과 용어의 선택, 글자의 모양, 편지지의 색 등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고, 특히 문장 구성에 있어서는 보내는 자의 인격이 노출되기 때문에 세심한 정성이 요망되기도 한다. 
 
그래서 작성한 연애문을 읽고 또 읽어 보면서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면 수정과 재수정을 하는가 하면 특히 학문적 수준을 과대 포장하기 위해 고급 용어를 메모하여 부분 표절(剽竊)을 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글자를 바르게 쓰기 위해서 서체를 바르게 하고 깨끗하게 써 보는 글자 쓰기 연습은 수업 시간의 노트 정리보다 더 신경을 쓰는 부분이다.
 
오늘날은 전화, 이메일, 카톡, 메시지 등을 통해 초고속으로 의사전달을 한다. 젊은이들이 장소 불문, 사간 불문, 눈치 불문하고 주고받는 고도의 기능성을 갖는 메시지 조작 능력은 20세기 출생자들이 볼 때 안구가 돌출하는 놀라움을 주는 사건화의 현상들이다.
  세상이 문명화되었으니 연애편지를 보내는 것도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야 마땅하겠으나, 60세 이상의 세대가 경험했던 연애편지는 단순한 연애편지만의 단일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일군 정서적 함양은 물론 문학적 소양과 자신의 내면적 성찰을 통해 인격을 도야(陶冶)한 자율적 인간화의 높은 기능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춘기를 거치며 이성에 대한 존경심과 동경의 정서를 갖는 것은 성숙적 변화에 의한 다행한 일이다. 만약 이런 본성적 감정이 없었더라면 남녀는 인간 세상을 구성하는 단순한 성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진정 다가서고픈 이성 앞에 성추행이라는 애매한 정지신호가 마음과 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으니, 그래서 사랑하고픈 이성을 강취하려다 법정에서 만나야 하는 가관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오늘도 에메랄드 빛 창가에서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 어느 저명한 시인의 시구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듯하다. 독서가 연애편지를 잘 쓰는 데 기능적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잉용(仍用)할 목적으로 교과서 내용 가운데 감명과 감동을 주는 글을 외우고 또 외우기도 한다.
 
“이 몸이 삼기실제 임을 조차 삼기 시며 한 생 연분인가 하날 모를 일이로다. 내 하나 젊어 있고 임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때 노여없다.”라는 송가가사며, “임은 갔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임은 같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라는 문장 등은 반세기를 보낸 지금도 장기기억으로 남아 있는 고교 시절에 배우고 익힌 시가들이다.
그래서 부(富)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富潤屋), 덕(德)은 몸을 윤택하게 하며(德潤身), 독서가윤신(讀書可潤身)이라 설파한 것 같다. 몸을 윤택하게 하려면 독서를 하라는 것이다. 석년(昔年)의 연애편지가 낙엽진 사철(似鐵) 잔가지에 남겨 놓은 까치밥 단감처럼 새삼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