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월의 유작 친필 노트가 쉰 권, 166수가 공개되었다. 목월의 아들 박동규 교수는 어머니가 소중히 보자기에 싸서 보관하던 선친의 유작을 자신도 고령이 되자 세상에 공개한다고 했다. 목월은 1978년 3월 24일 산책 도중 쓰러져 운명하셨기에, 시들은 회심의 역작으로 출간 준비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박 교수는 자신이 태어난 1939년에, 목월이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장’ 지에 등단이 되어 시인되었다고 한다. 1946년 조지훈, 박두진과 청록파(靑鹿派)를 결성하고 청록집(靑鹿集)이라는 시집을 발간하였는데, 이는 그의 시 ‘청노루’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도 동리목월문학관 목월 시인의 방에는 ‘靑鹿山房(청록산방, 1972년 작)’ 이라는 시암 배길기 선생의 편액이 걸려있다.
 
박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스물 셋이던 목월은 당시 경주의 금융조합에 취직되었다. 어린 아이와 어머니, 세 식구는 팔우정 부근(쪽샘 마을로 추정)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어느 날 목월은 수기한 ‘0’ 하나를 잘못 보아서 회사에 손실을 끼친다. 그 해결책으로 3년간 월급의 3분의 2가 차압되었고 거처도 고향 모량으로 옮겼다.
  모량에서 경주까지 걸어서 아침저녁 출퇴근을 했는데 효현리 들판을 지나면서 ‘나그네’를 짓고 시는 시인의 대표작이 된다. 필자는 큰집이 모량리여서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고 간 일이 있다. 필자의 가친 심천 선생은 모량 2리가 고향인데 목월 생가와는 거리가 오백 미터 정도이다. 어린 시절 가친은 그 집에 놀러 가곤 했는데, 목월의 선친 ‘준필’ 어른이 계셨고, 한시에 능했다고 한다.
 
지난 5월 18일 효현에서 목월 생가까지 걸었다. 모량까지 10리에다 생가까지 1.4 km, 약 1시간 반쯤 걸린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걸어서 출퇴근 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거리다. 새벽과 밤이 되어 어두워지면, 보이는 건 달과 별밖에 없으리라!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주위가 온통 논이었으니 개구리 소리에, 술 익는 마을이 있고 강이 있었으니 ‘나그네’ 시가 나올 만하다. 
 
문득 그의 모교인 ‘건천초등학교’ - 목월 할머니와 자당이 새벽마다 다녔다는 ‘건천교회’ – 소년 목월이 학교 다니던 길 - 금척리 이근식 시인 시비 – 목월 생가– 1945년 설립된 80년 역사의 모량교회– 법흥왕릉– 효현 나그네길 – 쪽샘 목월 생가와 금융조합을 연결해서 ‘시인의 길’ 또는 ‘목월길’로 걷기길을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목월의 출퇴근길이니 뜻깊지 않은가. 거기에다 동리목월기념관으로 이어져 ‘문학의 길’로 하면 더욱 좋겠다. 목월의 새로운 시 신작노트 ‘뭐라카노’ 중에서 한 편을 소개한다.
‘손이나 저어라 강기슭에서/ 서서 흔들리는 갈밭너머로/ 뭐라카노/ 네 목소리는 바람에 불려서/ 저승 아니믄 이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옷자락은 바람에 날려서/ 뭐라카노/ 하염없는 인연의 구름은 풀리고/ 오냐 오냐/ 끝내 마지막 한마디도 바람에 날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