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정신은 따로 존재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6월을 시작했다. 필자 생각은 몸과 정신은 분리될 수 없으며, 의식은 몸속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몸은 단순한 정신이 내리는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정신활동은 몸속에 스며 몸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몸은 모든 감각 대상들로부터 ‘감각력을 지닌’ 대상으로 존재한다. 이때 몸은 다른 대상들처럼 감각을 가지고 있는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색깔과 소리에 반응하는 감각 주체가 된다.
 
몸이 감각 주체가 될 때 몸 일부, 혹은 전체가 대상을 취하기도 하지만 대상이 감각을 취할 수도 있다. 이러한 몸이 지니고 있는 감각 작용은 ‘교류’ ‘지향’ ‘교접’으로 나타난다.
 
필자 몸은 손에 쥐고 있는 스마트폰이 아니다. 모든 대상들은 눈에 보여 지거나 손으로 만져지는 것, 내 앞에 놓여있는 것들로 사물이다. 몸은 ‘나’라는 몸을 가지고 있는 ‘내’ 것으로 첫 바탕이면서 동시에 ‘나’라는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특별한 것으로 주체이다.
  하지만 어떤 대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은(시야에서 사라질 때) 대상이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 그 대상은 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몸으로부터 떼어내서 생각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 몸을 관찰할 수 없는 경우에도 몸은 언제나 내 것으로, 삶이 지속되는 한 나에게 계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글을 쓰기 위해 서재에 들어서자 책상, 의자, 노트북, 디지털 앨범들이 하나씩 고유한 의미로 가치를 가지기 시작했다. 공간에 배치된 사물들은 고유한 속성을 지니며 필자에게 다가왔다. 특히 디지털앨범은 정지된 기억을 보여주면서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 볼 수 있게 작동하고 있었다. 노트북이 부팅되어 필자와 마주하자 서재에 놓여있는 책과 대상들이 생산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판과 마우스가 움직이자 모니터에 새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어느 상쾌한 초여름 새벽, 내내 닫혀있던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자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강렬한 햇살은 평범한 대상들을 변형 시키기에 충분했다. 햇살에 의해 변형된 사물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여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익숙해진 모습들이 다른 모습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창밖으로 향한 시선으로 갓 올라온 어린 새순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서재가 어둡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서재에 자리 잡고 있는 대상들이 배경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대상들이 뒤로 물러나자 죽음이라는 단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혈액암 판정을 받고 치료받던 중 소식이 끊겼다. 몸이 필자 시야에서 사라진 것이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봤더니 몇 개월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많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만날 때까지 안녕!”이라는 문자를 받은 터라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죽음은 슬프다.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죽음에는 누구 잘못도 없다. 그저 죽음이 찾아왔을 뿐이다. 어떤 죽음은 조금 일찍 찾아오고, 어떤 죽음은 늦게 찾아 왔을 뿐이다.
 
이제 몸이라는 대상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몸은 이곳에 없다. 몸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그 대상이 가지고 있던 정신도 가물가물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인연을 맺었던 시간들이 모두 春夢같은 시간들로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 그 대상은 있는 것이다. 죽음은 몸이 ‘몸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몸으로부터 떼어내 생각할 수 없지만, 2인칭 죽음은 많은 생각을 만들어 왔다. 최근 친구, 친구 부인, 어머니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1인칭인 필자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새벽부터 몸과 정신을 생각해 봤다. 몸과 정신이 온전할 때 많이 사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