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녕자(丕寧子)는 신라 진흥왕 때 사람이다. 그의 고향과 족성(族姓: 겨레의 성)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흥왕이 등위(登位)한 원년(元年)에 백제가 많은 병력을 이끌고 무산(茂山: 지금의 무주), 감물(甘勿: 지금의 금릉군 감물면), 동잠(桐岑) 등의 성을 공격하니, 김유신이 보기병(步騎兵) 1만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니 사기(士氣)가 꺾이고 힘이 쇠진(衰盡)하였다.    사기진작은 전장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김유신이 비녕자가 힘을 다하여 같이 쳐들어가 싸울 뜻이 있음을 알고, 불러서 말하기를 “세한(歲寒)이 된 뒤에야 백송이 뒤늦게 퇴색함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 오늘의 사세(事勢)가 급하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분동(奮動)하여 기묘한 꾀를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겠는가.”하고 이에 함께 술 마시면서 은근한 뜻을 비치니, 비녕자가 재배하고 말하기를 “지금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 특별히 내게 일을 부탁하니 지기(知己)라 할 것이요.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하겠소.”하고 나와서 종 합절(合節)에게 말하기를 “내가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겠다(吾今日上爲國家 下爲知己死之). 내 아들 거진(擧眞)은 나이는 어리지만 씩씩하고 강직한 뜻이 있으므로 반드시 함께 죽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부자가 함께 죽는다면 집사람들은 앞으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내 해골을 잘 거두고 돌아가서 그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하고 말을 마치자 곧 말에 채찍질하며 창을 비켜 들고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 여러 사람을 쳐 죽이고 마침내 죽었다.   아들 거진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나가려 하니, 합절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의 말씀이 합절로 아랑(阿郎: 거진의 존칭)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夫人)을 안위(安慰)하라 하였습니다. 지금 아들로서 아버지의 명(命)을 저버리고 어머니의 자애를 버린다면 어찌 효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말고삐를 잡고 놓지 않았다.   거진은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구차스럽게 사는 것을 어찌 효도라 할 수 있겠는가.”하고,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쳐서 끊고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죽었다.   합절이 가로되 “사천(私天: 종에 대해 그 주인을 일컫는 말)이 무너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하리오.”하고 또한 전장에 나아가 싸우다가 죽었다. 신라 군사들이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감격하여 다투어 나가니, 가는 곳마다 적의 기세를 꺾고 진(陣)을 함락하며 크게 적병을 깨트리고 3천 여급(餘及)을 베었다.   김유신은 세 시신(屍身)을 거두고 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슬피 곡읍(哭泣)하였다. 진흥왕이 이들의 장렬한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반지산에 합장하고 그 처자와 구족(九族: 고조로부터 현손까지의 친족)에게 은상(恩賞)을 더욱 후하게 내렸다.   신라 화랑들이 전장에 임하여 보국위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례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경지』, 『경주삼강지』 등에 많이 발견된다. 비녕자는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자기가 선택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지기지우(知己之友)의 고결한 우정을 나라와 지기(知己)를 위해 기꺼이 죽음으로 보답한 충의사적(忠義事蹟)은 어찌 후세인이 망각할 수 있으랴.   북한이 계속 미사일을 발사하고, 심지어 오물 풍선까지 날려 보내고 있음을 볼 때 국방은 과연 튼튼한지, 국민들의 보국지심 또한 비녕자의 충의사례에 부끄럽지 않은지 보훈의 달에 마땅히 생각해 보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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