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사춘기가 내게도 찾아왔나 보다. 창문을 적시며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혹은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노라면 문득 젊은 날 가슴 절절히 사랑했던 사람이 떠오르곤 한다. 이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젖는 것으로 보아 결코 가슴이 바짝 메마른 것만은 아닌 성 싶다.
젊은 날 가슴 태우는 사랑 한번 쯤 안 해 본 이 그 누구이랴. 정녕 그이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고 숨조차 쉴 수 없으리만치 절박했던 사랑, 그토록 열렬했던 사랑에 대한 감정도 흐르는 세월 탓인지 이즈막엔 빛바랜지 오래다. 당시 열애엔 희망이 있었다. 언젠가 형편이 허락하면 결혼을 하겠다는 희망이 그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것이 무너지는 날이 다가올 줄이야.
 
젊은 날 오늘처럼 흰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날, 그는 분홍색 손수건을 불쑥 내 앞에 내민 후 곁을 떠났다. 필자 부모님 반대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 그는 손수건을 내 손에 꼭 쥐어주며 자신이 떠났다고 눈물 흘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해왔다. 훗날 열심히 삶을 살 때 혹여 땀을 흘리면 그 때 자신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그 땀을 닦아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의 말은 비록 자신은 필자 곁을 떠나지만 마냥 슬픔에만 잠기지 말아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은 흔히 말하듯 받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게 주는 것이기에 진정한 사랑은 더욱 어렵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오직 그이만을 순정으로 사랑했었다. 가슴에 ‘불변’이라고 그이가 써준 언약을 철석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이젠 옛 사랑 추억만큼이나 올이 낡아 색깔마저 희미해진 한 장의 손수건 만 지난날 아름답던 추억을 올올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손수건에 대한 가슴 저린 추억은 비단 필자뿐만이 아닌 듯하다. 공지영 소설가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에도 손수건에 얽힌 작가의 슬픈 사연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이제 헤어지다니. 이제 헤어져 /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다니 / 영원히 끝나다니. 나와 그대/ 기쁨을 가지고. 또 슬픔을 지니고/ 이제 우리 서로 사랑해서 안 된다면/ 만남은 너무나도 괴로운 일/ 지금까지는 만남이 즐거운 일이었으나/ 그 즐거움이 이미 지나가버렸다/ 우리 사랑 이 모두 끝났으면 / 만사를 끝내자. 아주 끝내자’ 존 시먼즈의 ‘사랑한 뒤에’라는 시어가 산문 첫 단원을 시작한다. 그 시 주제인 이별의 슬픔에 가슴이 뻐근한 상태로 「사랑한 뒤에」라는 공지영의 산문 작품을 대하였다. 그래서일까. j라는 사람이 보내온 손수건에 대한 작가의 가슴 시린 이야기가 마음에 깊이 와 닿는다.
  공지영 작가는 이 책에서 j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안겨준 이별을 참으로 성숙한 시각으로 아름답게 승화 시키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늘‘봐줘라’로 말 한 것을 떠올리며 상대가 안겨준 뼈아픈 이별마저도 너그러이 봐주려고 안간힘 쓰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은 경험해본 사람은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이별이 얼마나 가슴을 속속들이 파헤치어 뼈를 녹아내리는 듯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인가를 말이다. 사랑한 뒤에 찾아오는 게 이별이라면, 누구나 그 길을 피할 수 없다면 사랑이 참으로 두렵다.
이제 두 번 다시 지난날처럼 애틋하고 가슴 뜨거울 사랑이 내게 찾아올 리 없으련만 이 나이에도 그 두려움에 괜스레 가슴이 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