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이하여 전교생이 교정의 동편에 세워진 ‘전몰학도추념비’ 앞에 추념식을 올리기 위해 모였다. 가을 날씨가 다소 차가웠다. 교복 단추를 다시 잠그고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모두가 단정한 복장으로 바르게 서서 처음으로 행하는 추모행사에 관심을 가졌다. 식순에 따라 엄숙하게 의식이 진행되었는데, 69년 전의 일이라 전부는 기억되지 않았으나 졸업생 선배가 김군, 이군, 박군을 부르며 고주파(高周波)의 음성으로 울면서 하신 말씀에 모두가 감동하여 울었던 기억은 자금도 선명하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한없이 슬퍼하며 말씀하시던 명문장의 말씀은 김소월 시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전사한 학우를 생각하는 간절한 울음이었다. 한 교실에서 매일 만나 정답게 수학했던 학우들이 높은 꿈 푸른 이상을 마음껏 피워보지 못하고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서사어적(誓死禦敵)을 다짐하며 전장에 투입되어 대부분 죽어 갔으니, 목석간장인들 어찌 슬프지 않으며, 6.25전쟁이 한없이 원망스럽지 않으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괴뢰군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하여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으니, 세태(世態)는 책상에 앉아 웃으면서 공부할 형편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까지 전장에 투입(投入)되었다. 이름하여 학도병(Student soldier)이다.   1995년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공간사 학도의용군에 의하면 학도병은 6.25 전쟁 발발시부터 1951년 4월까지 대한민국 학생 신분으로 지원하여 전후방에서 전투에 참여하거나 공비 소탕, 치안유지, 간호활동, 선무공작 등 군과 경찰의 업무를 도왔던 개별적인 학생 또는 단체로 정의하고 있다.   여(余)의 재종형은 동료 65명과 같이 학도병으로 안강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형님은 키도 크고 의협심이 투철하여 다소 어려움이 예상되는 일이라 생각되어도 두려움 없이 남보다 먼저 앞서 처리하는 분이었다. 군가를 힘차게 부르며 단단한 각오로 보무(步武)당당하게 전장에 나가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여러 날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적의 포탄이 수없이 날아왔으나 고지에서 자신도 모르게 깜박 졸고 말았다. 이때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속에 나타나서 ‘영오야! 빨리뛰어라.’고 크게 고함을 치시기에 놀라 깨면서 뛰었더니 낭떠러지에 덜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박역포 포탄이 떨어져서 다른 동료는 안타깝게도 전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더욱 조심해서 전투에 임해서 전공을 세워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어 소대원을 이끌며 작전을 잘하여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전쟁이 종료된 후 육군 중위로 내남면장에 임명되었다. 그때 함께 입대했던 동료 65명 가운데 60명은 전사(戰死)당했고, 3명은 상해(傷害)를 입었으며 2명은 신체에 다침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형님은 요행(僥倖)스럽게도 그 2명 가운데 한 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 음덕(蔭德)으로 살 수 있다.”고 힘주어 말씀하면서 그 후 제사, 묘사를 비롯한 각종 위선사(爲先事)에 정성을 다하셨다. 손자를 살린 할머니의 음덕을 형님은 임종시(臨終時)에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조상을 잘 섬기면 복(福)을 받는다.”는 조선(祖先)의 말씀을 실증하는 6.25전쟁 일화(逸話)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매우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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