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을 ‘어버이날’로 부르게 된 것이 1973년부터였을 것 같습니다. ‘어버이’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부르는 우리 옛말입니다. 지금은 낳아주신 부모님 두 분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어버이날’로 정착되었지만 1973년 이전에는 같은 날짜를 ‘어머니날’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사실 어머니날도 미국 문화가 쏟아져 들어오던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영향으로 생겨났고 그 날 어머니 가슴에 붉은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던 것도 미국 ‘마더스데이(Mother's Day)’ 풍속을 따라한 것이라는군요. 그런데 자녀를 낳아 양육하고 교육하는 것이 어머니 혼자만의 공로는 아니라며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한 아버지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1972년부터 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정작 미국에서 아버지날은 6월 중에, 어머니날은 5월 중에 각각 따로 있습니다.
  오랜 유교문화의 전통으로 우리나라는 엄친자모(嚴親慈母), 엄부자친(嚴父慈親)을 이상적 부모상으로 여겨, ‘엄한 아버지’는 자녀를 엄격하게 다루어 곧고 바른 모습으로 이끌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도탑고 포근한 사랑으로 자녀를 감싸 기르는 것이 고정관념화 되어왔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고려가요 ‘사모곡(思母曲)’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호미도 날이언마는 / 낫 같이 들리는 없습니다. / 아버님도 어버이지마는 / 어머님 같이 사랑하실 리 없습니다.’
요즈음에야 아버지라는 무거운 권위를 내려놓은 친구 같은 아빠도 많고 아빠보다 더 무서운 엄마도 없지 않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누운둥이 때부터 먹이고 재우고 돌봐주는 이는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압도적입니다. 우리의 시나, 대중가요의 노랫말에서 어머니의 스테레오 타입은 언제나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캐릭터입니다. 
 
예전 가난하던 시절에는 여럿 되는 자식들 배를 채워주려고 어머니 몫의 밥은 보리 누룽지 끓인 것 한 보시기 그것도 없으면 찬 물 한 사발이 전부였습니다. 생선 한 마리로 여럿 자식을 먹이자니 어머니는 항상 생선 머리가 제일 맛있는 이상한 입맛을 가진 사람이 되고, 그렇게 자란 자식이 어머니를 위한답시고 나들이 가는 어머니 도시락에 구운 생선 머리만 한 가득 담아놓았더라는 웃지 못 할 효자 에피소드가 생긴 것도 어머니의 희생이 만든 결과겠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노랫말에서 어머니는 애틋하게 그리운 사람이 됩니다.
  사실 가족을 부양할 의무를 짊어진 아버지도 매일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일터로 나가지만 어린 자식들의 눈에 아버지의 노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밤늦게 귀가하는 일에 지친 아버지의 모습이 싫고, 피부에 닿는 어머니의 살가운 사랑과는 다른 무덤덤하고 무뚝뚝한 표현만 귀에 들어옵니다. 
 
시간이 흘러 자식이 성인이 되고 자기도 자식을 낳아 아버지가 되면서 비로소 지나가 버린 시간 속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되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게도 됩니다. 애증의 마음으로 아버지와 멀찍이 거리를 두었던 자식은 철이 들어서야 아버지를 알게 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한 아버지는 자식의 가슴에 멍이 되고 회한으로 남습니다. 가수 인순이가 부른 ‘아버지’, 가수 싸이가 부른 ‘아버지’의 노랫말에는 뒤늦게야 아버지의 삶을 알게 되는 자식의 모습이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가지 못했던 / 그래 내가 미워했었다’(인순이 ‘아버지’ 중에서)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 어찌 그렇게 사셨나요’(싸이의 ‘아버지’ 중에서) 아버지를 가리키는 한자 ‘’父는 두 손에 막대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상형화한 문자로 ‘공동체 안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을 뜻하다가 후에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를 뜻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라는 말에는 권위가 담깁니다. 그러니 가르침의 은혜가 높은 스승을 아버지처럼 높여 일컬어 ‘사부(師父)’, 건국에 큰 공로를 세워 국민으로부터 아버지처럼 존경 받는 사람은 ‘국부(國父)’라 불리기도 합니다. ‘아버지’란 말에는 자연스럽게 존경이 담깁니다.
 
최근 어떤 국회의원이 자신의 정당 대표를 ‘아버지’라 지칭한 것으로 가타부타 말이 많습니다. 그러자 그 의원이 변명이라고 ‘영남 남인의 예법’ 운운하자 이번에는 영남의 유림들이 반발합니다. 
 
언론은 또 이것을 미주알고주알 보도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이에게 아부성 발언을 한들 상대가 언급된 아부의 경지까지 높아지는 것도 아닐진대, 그가 흘리는 말의 경박함에 혀 한 번 차고 말면 될 것을 다들 야단법석이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민생고에 시드는 국민들의 눈에는 깃털처럼 가볍고 경박한 정쟁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어느 희극인이 만들어 쓰면서 인기를 누렸던 ‘소는 누가 키울 거야?’란 유행어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국민을 살릴 정치는 대체 누가 할 거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