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1번지에 가면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의 묘소가 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개화사상이 투철하여 15세 때 집안의 노복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논밭을 모두 나누어 주었으며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가 1907년 졸업을 하고 18세에 호명 학교를 설립하여 문맹 퇴치에도 앞장섰다. 
 
1916년에는 군자금을 모금하고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19년 3.1독립 운동 후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훈련 시키고 이들과 함께 청산리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여 3,000여 명을 살상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1925년 김혁과 신민부를 조직하여 중앙 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30년 한족 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취임하여 재 만주 동포의 교육과 민생문제에 주력하였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한 채 1930년 1월 24일 머나먼 이국땅에서 41세의 일기로 공산 당원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는 사망 후 바로 만주 땅에 묻혔다가 1940년 부인 오씨가 장군의 유골을 밀감 상자로 위장해 본국으로 들여와 고향 땅인 홍성으로 이장했다. 그 후 1957년 부인이 세상을 뜨자 아들 김두한이 홍성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보령의 현 위치에 이장해와 어머니와 함께 부부합장으로 모셨고, 1989년 충남도에서는 장군의 업적과 독립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 묘역을 충청남도기념물 제73호로 지정하였다. 
 
그가 공산 당원에게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남긴 말(“할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에서 그에 대한 애국심의 진면목을 가늠해볼 수 있다.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전 국회의원 김두한이고 김을동 전 의원이 손녀이며 연기자 송종국이 외 증손자이다.
 
이곳의 산세는 금북정맥 줄기 오서산(790m)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려 아차산(423.8m)을 일으키고 아차산에서 이어져 내려온 지맥의 끝자락에 묘소가 있다. 상하 아래위로 두 기의 묘소가 있는데 위에 있는 묘는 아버지 김형규와 어머니 한산 이씨의 합장묘이고 바로 아래의 묘가 장군 부부의 합장묘다. 
 
이 혈장은 혈의 사상으로 볼 때 유혈(乳穴)의 혈장으로 묘소 주변의 산세는 혈장 뒤의 현무와 묘소 앞의 주작 그리고 좌청룡, 우백호의 모든 사신사들이 서로 끌어안듯 감싸주어 장풍국(藏風局)을 이룬다. 그리고 주변 골짜기에서 나온 물들은 묘소 앞 명당에 모여들어 혈장에 생기를 공급하고 우측 술(戌)방으로 빠져나간다. 마지막 입수 1절 용은 우선룡이고 수세는 우선룡에 좌선수로 합법하며 좌향은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정 서향이다. 
 
그 당시에만 해도 국내 풍수가에서 88향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묘좌유향에 좌선수 신술파는 88향법으로 보아 자왕향이다. 『地理五訣』에 이르기를, 자왕향은 남총여수(男聰女秀)하고 조빈석부(朝貧夕富)라 하여 매우 빠른 발복을 가져다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풍수가에선 김좌진 장군이 태어나서 자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생가도 철마산 아래 배산임수형 명당으로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