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에서 고속전철을 기다릴 때다. 앞서 온 열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곧이어 기차는 굉음을 내며 속도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 때 출발하는 열차를 쫓아 역(驛) 저만치서 바람같이 달려오는 한 청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열차 안에 있는 누군가를 향하여 손을 흔들며 뛰어온다. 그 젊은이 모습을 보자, ‘아마도 열차 안엔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가 보다.’라는 추측을 했다. 이 생각에 차창 밖으로 비치는 열차 안 사람들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 청년이 혼신을 다하여 달려서 내가 서있는 지점쯤 이르렀을 때다. 열차 안엔 앳된 모습의 긴 머리 여인이 거지반 울상이 된 표정으로 차창 밖을 향하여 손을 흔든다. 이 때 그녀 모습을 본 청년은 더욱 젖 먹은 힘을 다하여 기차 뒤꽁무니를 따라 뛴다.
기차가 쏜살같이 달려서 저 만치 그 모습을 감추자 그토록 힘차게 뛰던 청년은 힘에 부쳤는가 보다. 곧이어 뛰는 것을 멈췄다. 그리곤 기차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망연히 서 있었다. 이 광경을 보자, 갑자기 그의 여인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못내 부러웠다. ‘얼마나 여인을 깊이 사랑했으면 이별 앞에 이토록 애절한 모습일까.’싶어서였다. 요즘 일회성 사랑이 난무하는 세태여서 더욱 그의 여인을 향한 순정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한동안 제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청년은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걸어서 침통한 표정으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의 온 힘을 다하여 여인이 탄 열차를 뒤쫓는 모습에서 두 사람의 사랑 농도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이 생각에 이르자 왠지 그들이 겪는 이별의 아픔이 내게도 전이 되는 기분이었다. 절로 가슴이 뻐근해왔다. 한편 그 순간 문득 젊은 날이 떠올랐다. 젊은 시절, 분홍빛 아름다운 기억 몇 조각 쯤 가슴에 저장 하지 않은 사람 몇이랴. 나 역시 그 청년을 대하자 여태껏 심연 깊숙이 내재됐던 가슴 시린 추억이 스멀스멀 피어오름을 느꼈다.
스무 살 라일락 꽃향기가 향기롭던 어느 날, 그는 나에게 눈물을 보이며 논산 훈련소로 떠났다. 나 역시 그를 태우고 역에서 멀어져가는 입영 열차를 바라보며 얼마나 눈가를 훔쳤던가. 그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하이힐을 벗어들고 지금 저 청년처럼 그가 탄 기차를 따라 손수건을 흔들며 정신없이 뛰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때 그가 군대 입대 전 내게 들려주던,‘ If you go away’ 이 노래는 지금도 귓가에 맴돌곤 한다.
  ‘If you go away On this summer day / Then you might as well Take the sun away / All the birds that flew In the summer sky/-생략’‘이 여름 날, 당신이 떠나버리시면 / 당신은 태양마저도 데려가 버리는 거에요 / 여름 하늘을 날던 새들까지도 모두 말이에요.-생략’
그는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참사랑을 깨닫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 당시 그는 내게 어쩌면 태양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노래 가사처럼 그는 내게 태양마저 데려갔다. 태양이 없는 세상은 암흑 그 자체 아닌가. 그는 군대 입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죽음의 손아귀에 그를 빼앗긴 후 많은 시간을 절망과 슬픔에 젖어 지냈었다.
  지난 시간 군대 입영 열차에 오르며 내 손을 꼭 잡아주던 그 온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으련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손을 흔들어주던 그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당시 그와의 사랑은 인생 전부 그 자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죽음이 그와 함께할 미래를 앗아가 버렸다. 인생에서 사랑과 꿈을 잃는 것은 절망이다. 더구나 목숨처럼 사랑했던 사람과의 영원한 별리(別離)는 암흑과 같았다. 그가 이승을 떠난 후 한동안 고독의 심연에 빠진 채 손끝 까딱 할 수 없으리만치 무기력 했었다. 요즘도 그가 생전에 내게 들려줬던, ‘If you go away’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젊은 날 가슴 시린 사랑이 또렷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