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덜 사랑하는 사람?지난 글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썼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약속장소에도, 상대 마음에도 일찍 도착한다. 상대가 늦는 대수롭지 않은 이유를 쉽게 용납한다. 기다리지 않는 심지어 도착하지도 않는 상대를 기다리다가 나는 “패자”(롤랑 바르트)가 되고 만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상대를 더 사랑할수록 자신을 덜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것. 사랑은 언제나 무한히 솟아나지만 현실에선 꼭 그렇지 않다. 외부 사랑을 갈구하느라 정작 자기 내부는 돌보지 못하곤 한다. 스스로의 돌봄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나는 결국 외부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사랑의 아이러니.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기다리는 사람은 어쩌면 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상대에 비해 더 사랑할진 모르지만 기다림을 뛰어넘는 행위를 할 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용기가 없거나 타이밍을 못 맞췄을 수도 있겠다. 다른 불가항력적인 이유가 존재할 수도 있겠다. 어쨌건 거절당하는 아픔은 우리를 행동하지 못하는 겁쟁이로 만든다.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즐기는...상대는 어떨까. 어쩌면 나의 기다림을 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기다린다는 사실을 또는 약속장소를 알려주지 않았기에 못 오는지도 모른다. 알려주지 않음을 상대에 대한 배려라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본심은 거절당하는 아픔, 버림받은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렇다 기다리는 사람은 상대가 오지 않는 시간을,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즐기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자기 내부를 그리움으로 채우는 수동적 행위다.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다. 마음을 전하는 실제 행위를 하기보다 자기 내부를 상대를 향한 그리움으로 채우기만 한다. 그렇게 그리워하는 자신에 취하고 패자라는 달콤씁쓸한 감정에 취한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찾아가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숱한 기다림과 실패를 겪으며 얻은 깨달음이다. 사랑은 손 뻗으면 만질 수 있는 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움직여야 찾을 수 있는 동적인 감정이다. 정적으로 그리워하기보다 깨지고 실패하더라도 직접 부딪치기. 이런 의미에서 사랑을 찾아가는 사람을 ‘더 잘’ 사랑하는 사람이라 부르고 싶다. <나의 태양 너의 바다>나는 기다리는 사랑을 주로 해왔다.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기 두려웠기 때문. 겁 많은 내가 평생 처음 용기 내어 먼 곳을 찾아간 적이 있다. 서울에서 대구로 내려오는 기차 경유지. 가기 전 쓴 시를 적어본다. 상대가 스스로를 가둔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바다와 태양이 되길 바라며 썼다. 치는 파도를 보니 내가 바다인 걸 알겠다 / 짙은 어둠을 보니 태양인 걸 알겠다바다인 줄 모르고 파도에 쓸리지 않는 바다를 그리워했다 /태양인 줄 모르고 어둠에 먹히지 않는 시간만을 기다렸다밤새 심해를 가르며 발광하는 불덩어리 / 푸른 피 마시며 더 뜨겁게 떠오를 것이다내가 그대만의 바다와 태양이 되길 원하는 그대여 /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파도 거세고 어둠 덮치는 세상에서 / 스스로의 바다와 태양으로 우뚝서길 바란다내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 상처 햝는 그대 혀를 어루만지는 일 / 그대 혈관을 돌며 오래오래 사랑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