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을 할 때 내용물 못지않게 신경 쓰는 게 포장이다. 아무리 실속 있는 선물이라도 겉포장이 허술하면 그 속 물건이 하찮게 여겨진다. 볼펜 한 자루라도 포장을 잘 하면 값진 물건으로 여기니, 세상에서 가장 밝은 것 같아도 어리숙한 것이 사람 눈이 아닌가 싶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한다. 인체에서 눈의 중요함을 역설한 말이다. 관상학에서는 눈을 으뜸으로 삼는다. 눈이 맑고 빛나며 눈동자 흑백이 선명하면 총기 있고, 여성의 경우 부와 덕을 갖추어 이름 석 자를 널리 남긴다고 하였다. 눈이 붉게 충혈 되면 나쁜 기운이 찾아드는 징조니 매사에 조심해야 된단다.
아닌 게 아니라 눈빛이 맑고 선명한 사람을 보면 왠지 바라보는 이 마음마저 덩달아 안정되는 기분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한 눈이 때론 교연영색에 흐려지고, 화려한 겉포장에 홀리니 어리석다고 아니할 수 없다.
도심을 벗어나 시외 근교로 이사한지 십 년이 지났다. 이곳으로 이사를 한 순전한 동기는 주변 환경 때문이다. 살던 아파트도 주변 풍광도 빼어난 곳이었다. 그런데도 이사를 했으니 나의 눈은 남다르게 새로운 것을 좋아하나 보다. 이렇듯 눈 호사가 주거변동을 불러왔으니 언제 또 살던 집에 염증을 느낄지 모른다.
이사한 곳의 아파트 전면엔 호수가 보인다. 베란다 창으로 내다보이는 호수의 정경은 황홀할 정도로 멋지다. 단지 내 조경은 더욱 일품이다. 단지의 가운데쯤에 둥근 원형으로 조성된 정원이 있어, 거기엔 소나무, 매화나무가 원형을 따라 둥글게 심어져 있다. 해마다 새봄을 맞으면 매화나무는 춘화(春花)를 대표하듯 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곤 한다. 소나무에는 푸른빛이 날로 더해지고 아침 새소리도 유난히 맑다. 해마다 6월이 오면 베란다 창 가까이서 뻐꾸기가 구성지게 운다. 눈만 뜨면 정원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청아한 새소리에 매료돼 한동안 귀 기울이고, 바라보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며칠 전엔 자재를 싣고 온 차량 한 대가 아파트 마당에 멈춰 선다. 인부가 네 명이다.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나무 기둥을 세우고 싣고 온 목재를 조립하여 정자를 세운다. 주민의 편의를 위하여 세워지는 정자지만 왠지 나의 눈엔 그게 거슬렸다. 그렇게 두 채나 세울 모양이다. 다른 쪽에 붉은 색으로 둥그렇게 정자 세울 터까지 표시해 놓았다. 정원수가 심어진 잔디밭에 떡하니 정자가 버티고 설 터이니 그게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여백의 자연 경관을 인공 건물로 채우고 있으니, 이곳도 속물(?)이 살고 있기는 매한가지인 터이다.
자연은 원형을 유지할 때 가치가 있다. 함에도 인간은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아무 곳이나 손을 대려고 한다. 본질을 잃은 겉치레의 미(美)는 조잡하다. ‘여기에도 상혼이 끼어드는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산을 산으로 즐기고, 개천은 개천으로 즐기고, 꽃은 꽃으로 즐겨야 한다.
멀쩡한 사람이 편집증, 콤플렉스, 다중인격, 우울증 등의 정신병 병소(病巢)를 지니게 되는 것은 자연을 자연으로 모실 줄 모르는 경박 심에서 유발하는 것 아니겠는가. 복잡한 사회일수록 혜안이 필요하고, 진실을 볼 수 있는 개안(開眼)이 그래서 필요하다. ‘눈으로 말해요’ 라는 노래가 있다.
 
=눈으로 말해요/ 살짜기 말해요/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 사랑은 눈으로 눈으로 한데요/ 진실한 사랑은 눈을 보면 안데요/ 그 검은 두 눈은 거짓말을 못해요(생략)=
외모지상주의에 맞물려 쌍꺼풀 수술이 보편화 됐다. 눈동자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색깔 있는 렌즈도 유행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은 진실을 판단하고, 불의를 가릴 줄 아는 지혜의 눈이 아닐까 싶다.
인간애를 담뿍 담은 눈을 지닌 사람을 만나 문우지정을 나누고 싶다. 나의 눈은 과연 어떨까? 오늘도 거울 앞에 앉아서 눈을 살펴본다. 그러고 보니 착각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진 인간애가 담뿍 담겨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