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서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명시로 꼽힌다.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 걸까 아니면 <서시>와 하나 된 '윤동주'를 읽는 걸까. 윤동주라는 후광을 지우고 시 그 자체로 읽을 수 있을까. 교과서 해설이 알려주는 대로, 많은 이들이 맞다고 가리키는 방향을 나도 모르게 따라간 건 아닐까.
 
오래 시를 쓰고 가르치며 품어온 궁금증이다. 시인의 후광이 지시하는 상징성 또는 선험 규정에서 벗어난 제대로 읽기가 중요하단 뜻이다. ‘위안부’도 마찬가지. 이미 엄청나게 주어진 상징성을 내려놓고 살아남은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즉 입에 올리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버린 할머니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의 필요성.
 
이를 서울숲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위안부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 명은 ‘우리가 그랬구나’.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국내 첫 공개 증언에 나섰을 때 또 다른 피해자 작가가 한 말. 전시는 우리-할머니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지금-우리와 공유하고자 하는 뜻깊은 시도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이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이기도 하다.《Nippon》, 번영과 수탈 사이나는 전시 둘째 날인 10월 5일 방문했다. 사전정보는 포스터, 간단한 소개 글이 전부. 부여된 상징성에서 벗어나 작품들이 전하는 얘기를 있는 그대로 듣고 싶었다. 전시 테마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할머니들 얘기를 그림/시/영상으로 들려주기, 할머니들의 과거 경험 재현하기, 일본인들의 목소리 들려주기.
  지하 갤러리에 들어서자 왼쪽 벽을 가득 채우는 《Nippon》 표지와 기사 내용. 《Nippon》은 일본 국가 이미지를 해외에 선전하기 위해 1934년 창간된 잡지(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보관). 표지 위에는 일본인 소유 농지, 일본으로 유출된 쌀, 이주민 등 증가 추세가 그려져 있다. 증가가 일본 입장에선 번영이겠지만 우리 입장에선 수탈. 밝고 세련되고 건강해 보이는 일본인들은 우리가 무엇을 얼마큼 빼앗겼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갤러리 안쪽에는 비디오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일본 군국주의 비판하는 고이즈미 메이로의 (2015). 일본 작가는 어떤 시각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지 궁금했다. 어두운 망망대해에 횃불이 타오르는 영상1. 다시 보니 일렁이는 불로 붉어진 남성의 얼굴. 웅얼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자막 “그는 울부짖었다. “악, 아아악!””
남성이 괴로워하는 건 망각? 무지?목소리를 따라 뒤편에 가보니 또 다른 비디오 영상이 있었다. 평범한 외모의 30대 후반 일본 남성(다나카 씨)이 등장하는 영상2. 중일전쟁에 참가한 일본 군인이 다섯 살짜리 어린 소년을 죽였다는 문장들을 읽는 중이다. 누군가 2층에서 소년을 미는 살육의 기록이 더듬더듬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실려 퍼진다. 즉 영상1은 영상2를 토대로 작가가 새로 제작한 것.
 
남성은 담담히 읽어 내려가다 인상을 찌푸리며 괴로워한다. 전시 기획자 안소현은 21세 때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장애(Amnesia)를 가진 사람이라 알려주었다. 남성은 바로 앞에 읽은 문장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 못 함의 고통이 크게 느껴졌다. 기억 못 해도 된다며 응원해주고 싶을 정도. 알고 보면 불리한 역사는 감추고자 하는 일본의 가해 망각을 은유하는 영상임에도.
 
내 관심을 끈 건 다른 부분이었다. 문장 내용에 대한 고통은 느끼지 않는 듯한 표정. 어린아이를 살육하는 잔혹한 내용에는 무감각해 보이는 표정에서 전율이 일었다. 역사를 기록한 문장을 눈으로 따라 읽기만 할 뿐 문장에 담긴 뜻은 읽지 못하는(또는 않는) 무감각함. 망각과 무지를 오가는 일본의 현재 모습과 겹쳐졌다.
 
무감각한 것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주어진 문장을 그저 따라 읽으면 된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다. 진실은 남성만 알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무감각의 차별성 또는 망각의 복합성이 작가가 말하는 바라고 내 맘대로 해석한다. 작가는 기억장애와 가해 망각, 망각의 고통과 살육에 대한 무감각을 섬뜩하게 대비시켜 보여준다.노래가 바로 증언이다!
왼편 통로를 지나치니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과 쓴 글씨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사이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찍은 영상 <그때 부르던 노래가 있어>(안해룡, 2024). 할머니들의 노래는 구슬프기도 하고 명랑하기도 하다. 피해자다움을 무색하게 만드는 명랑함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 명랑함은 고통을 견디게 하는 힘이면서 당시 할머니들 삶의 소중한 일부였을 것이다.
 
무슨 노래인지 기획자에게 물어보니 일본, 버마(현 미얀마), 인도 등 위안소에서 불렀던 노래라고.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노래들. 그렇다 노래가 바로 증언이다. 기획자는 고통 묘사도 중요하지만 몸이나 목소리가 보여주는 증언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그랬구나>는 육체에 새겨진 고통 또는 삶의 명랑함을 다양한 감각 매개를 통해 전해준다.
 
할머니들의 과거 경험을 재현한 영상도 보았다. 엄지은의 <긴 하루>(2024). 작가는 위안부 증언집을 읽으며 그 내용을 자기 몸으로 재현한 영상을 만들었다. 강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물살이 가볍게 찰랑인다. 솔직히 어떤 영상인지 모르고 볼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기획자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의미를 알고 보기에 전달엔 문제없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본 건 지옥 같은 동굴에서 탈출해 폭포에라도 빠져버리고 싶다는 증언을 재현한 장면.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바로 발바닥에서 소름이 끼쳤다. 그저 강물이던 것이 끈적거리는 피의 질감으로 느껴졌다. 몰랐을 때 감각과 알았을 때 감각의 간극이 주는 강렬한 충격. 역사가 감각으로 전이되는 기현상. 역사를 다루지 않아도, 피해를 묘사하지 않아도 고통이 전달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사진가와 큐레이터의 만남두 기획자 이력이 특이하다. 서영걸은 사진가로 남극 장보고 과학기지 공식 사진가로 활동했다. 안소현은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이며 프랑스 장물렝 리옹 3대학 박사를 마쳤다. 두 사람은 내가 글쓰기 강의를 하는 대안연구공동체에서 각각 사진과 미술 강의를 한 바 있다. 이들과는 사적인 인연이 전혀 없다. 전시회 관람 후 감상을 글로 남길 뿐.
위에선 영상 위주로 소개했는데 다른 작품도 많다. 소개한 작가들 외에 김지평, 서평주, 송상희, 이토 다카시, 전진경, 정정엽, 주용성, 홍이현숙 작가가 참여했다. 서울숲 더페이지갤러리에서 10월 31일까지. 문의 02) 3447-0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