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 스님(1913~1983)은 전북 김제 출신으로 속명은 김금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주변 사람들에게는 신동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어릴적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14세 때에 면암 최익현의 문하 이극종으로부터 사서삼경을 공부했다. 
 
일찍부터 유학의 전 과정을 마친 탄허 스님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고자 스승을 찾았고, 마침 오대산 상원사에서 조계종 초대 종정인 한암 스님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스님과 만나 처음에는 3개월만 공부를 할 계획이었으나 노장철학에 심취하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상원사에 21년간이나 머무르게 되었다. 탄허는 절에 들어온 뒤 일체 경전을 보지 않다가 한암 스님의 권유로 불경의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때마침 오대산 상원사에는 승려연합 수련소가 생기고 여기서 한암 스님의 조교가 되어 ‘금강경’, ‘기신론’, ‘범망경’등을 가르치고 배우며 불교의 경전들을 섭렵하였다. 
 
23살 때부터 승려들에게 불경을 강의했고 1955년 한국대학(지금은 폐교)의 요청으로 맡았던 노장철학(老莊哲學) 강의는 처음에는 일주일 계획이었으나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두 달까지 연장되었으며 이 강의는 오늘날까지도 명강의로 소문나있다. 그 당시 수강생 명단에는 함석헌 선생을 비롯하여 양주동 박사 등 당대 쟁쟁한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의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가 있다.
  그는 1955년 월정사 조실에 추대된 뒤 우수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대한불교조계종 오대산수도원’과 ‘영은사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1966년 동국역경원 개원식에서는 공부하지 않고는 불경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기에 법당 100채를 짓는 것보다 스님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자로 100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화엄경> 80권을 붓다 이래 최초로 우리말로 번역해낸 유일한 인물이다. 10여 년간 매일 원고지 100장씩 쓰는 초인적인 작업을 거쳐 원고지 62,500장의 분량을 번역해냈다.
 
번역 후 출판기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중 일본 불교신도회에서 원고를 사겠다고 나섰으나 거절하고 오랜 기간 신도들의 도움으로 《신화엄경합론》이란 불교 최고의 경전을 간행하였다. 그런 후 번역의 공로를 인정받아 동아일보사 주최 제3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했고, 이 경전은 자상한 주석을 곁들여 우리말로 옮겨 놓음으로써 “원효ㆍ의상 대사 이래 최대의 불사”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생을 불교 경전 연구와 번역에 전념한 탄허 스님은 선(禪)과 교(敎) 양 종에 수많은 업적을 쌓았고, 한국 불교계에서 역사 이래로 원효, 의상대사와 더불어 한국의 뛰어난 3대 고승으로까지 불리었다. 그는 정역, 주역, 화엄경의 대가로 불교뿐 아니라 유교, 도교 역 철학에도 정통하여 도쿄대학, 국립타이완대학 등 여러 곳에서 특강을 해 세계적 석학으로 인정받았다. 1983년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에서 세수 71세, 법랍 49세로 열반에 들었고, 입적 뒤 종교인으로서는 최초로 국가에서 내리는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스승인 한암 스님이 선수행을 중심으로 교(敎)를 전개했다면 탄허 스님은 교학을 중심으로 하는 선자(禪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