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에 갔더니 내년 달력을 둥글게 말아 포장해 놓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져가라고 내놓았습니다. 요즘에야 예쁘고 질 좋은 포장지가 흔하지만 예전에는 지난 달력 낱장이 포장지로 참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특히나 새 학기에 새 교과서를 받으면 오래 깨끗하게 쓰려고 교과서 겉장을 한 겹 덧싸는 것은 꼭 필요한 절차였습니다. 
 
달력 종이는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표지 겉싸개였습니다. 해 넘긴 달력은 버리지 않고 잘 간직해 두었다가 새 교과서를 받아 정성껏 표지를 싸는 것으로 새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점점 올라갈수록 배워야할 교과목도 늘어나고 거기에 교과서를 보완할 참고서까지 더해지니 고등학생이 되면 책 무게 때문에 책가방을 든 어깨가 한쪽으로 쳐지고 심하면 척추가 휘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2025학년도부터 초등학교 3, 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와 수학 과목에 AI교과서 즉,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하여 시행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지나간 학창시절 기억 한 자락이 소환됩니다. 태블릿 하나로 필요한 교과서를 불러와 쓸 수 있으니 각 교과 별 종이책을 따로 지니지 않아도 되니 우선 편리하기는 하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거기에다 디지털교과서로 학생 개개인의 학습 능력에 맞춘 개별 맞춤형 교육으로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교육부의 취지도 나빠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부모들은 국민동의청원까지 제출하면서 이 정책을 반대합니다. 그들은 스마트 기기 사용이 문해력을 저하시킨다는 점과 스마트 기기 중독 등의 부작용을 근거로 들어 전체적인 도입 유보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에 의하면 지난 해 국내 청소년 10명 중 4명이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으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현장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 간에도 디지털교과서가 학습 데이터 수집과 분석을 통해 개별 학생의 이해도와 성취 수준에 맞는 학습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과 텍스트에 대한 학생 스스로의 이해와 사고력을 기르는 데는 종이책 읽기가 필수적이라는 입장으로 나뉩니다. 우리의 언어 행위는 보편적으로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의 네 영역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듣기와 읽기가 정보의 습득이라는 공통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읽기’는 시각에 의해서 인식된 문자가 뇌에서 청각적 신호로 전환되어 전달되는데 이 과정에서 내용의 합리성이나 적절성을 판단하는 과정이 있어 두뇌 활동이 더 적극적인 반면, ‘듣기’에 의한 정보 습득은 시각의 청각화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으므로 그만큼 생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이 생략된다고 합니다. 자연히 듣기는 읽기보다 사고력과 판단력이 덜 활성화되어 창의적 사고를 키우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정책 시행에 충분한 연습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는 점에도 우려를 표합니다. 디지털교과서를 학습 교재로 의무 시행하기 전에 먼저 보조적 학습 수단으로 채택하여 선택적으로 사용하면서 득과 실을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일부 학교를 대상으로 연구학교나 시범학교 과정을 거치기야 했지만, 긍정적 측면을 미리 염두에 두고 설득하려는 의도가 담긴 연구‧시범 결과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입장도 없지 않습니다. 백년대계라는 교육에서 시행에 급급하다가 이후 발생하는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시행착오는 없어야 합니다.
  학습에서 ‘디지털 기기’의 사용보다 ‘멘토링의 전문성과 적극성’이 학습자를 성공 사례로 이끄는 요인이 더 크다는 연구 사례도 있습니다. 일방적인 정보노출의 반복에 불과할 거라는 우려를 지닌 인공지능보다 ‘교사–학생’의 전통적 교육 역학 관계(Teacher Guided Learning)가 더 나은 학습 효과를 만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2013년 미국 실리콘 밸리의 유명 인사들이 거금을 투자하여 디지털 플랫폼을 중심으로 개인 맞춤 교육을 표방했던 대안학교 알트스쿨을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2017년 이후 이 학교가 ‘문맹자 양산, 피상적 기술 습득, 사고력의 부재’라는 실패한 결과로 문을 닫자 알트스쿨 학부모들은 ‘아이들이 기니피그 취급을 받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적절성이 검증되지 않은 디지털 교과서를 일방적으로 추진하려는 정책이 정책을 업적으로 삼으려는 정치인들과 디지털을 경제 활성화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자본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결과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는 입장도 있나 봅니다. 모쪼록 정부는 다양한 의견에 귀 기울여 득을 얻고자 하는 일이 독이 되지 않도록 신중하길 바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