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양성 평등을 부르짖고, 유리 천장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곳곳에는 음습한 성차별이 잔존하고 있음을 체험으로 실감한다.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기 관리에 지나치게 철저하면 독한 여인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여기서 자기 관리란 평소 남성들 앞에서 애첩 기질을 발휘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다소 편협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애첩기질이란 남자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추파를 던지거나 남자들 성희롱에 가까운 농담도 천연덕스럽게 받아치는 자세라고 해두자. 하긴 애첩기질을 지닌 여인에게 남자는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여성들의 다이어트 열풍도 실은 남자들 요구에 의해서라는 시각이 있기도 하다. 뭇 남성들은 요즘 사회적으로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입지가 좁혀지는 남자들이 여성을 휘어잡기 위해 바짝 마른 여성을 원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힘이 부치기 때문이라는 우스개소리도 있잖은가. 몸집이 뚱뚱하고 힘이 센 여성은 남자가 손아귀에 쥐락펴락 할 수 없단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자신들 힘을 과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바비 인형처럼 가냘픈 여인을 요구한다는 주장에 긍정적인 면도 없잖아 있다.   여성은 약자이어서 남성들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사회적 인식이 상당 기간 시대적 조류였다. 예로부터 여자 신분은 남자 권력 구조에 의해 형성되어왔기에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나 능력이 없어도 여자는 뛰어난 미모만 지니면 그것이 최상의 무기로 작용했던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여자는 남자만 잘 선택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이란 말이 아직도 유효한 것은 사실이다.   내가 무슨 페미니즘 성향을 지닌 것은 아닐지라도, 여성이기에 앞서 여자도 한 인간으로서 인권을 당당히 갖고 싶은 것만은 사실이다. 딸 셋이 있지만 여성이라고 해서 아들에 비해 뒤떨어지게 양육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사회에 나가면 여자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제약과 묵은 인습을 아직도 강요당하는 게 사실이다.  언젠가 미투 사건이 불거질 때 성폭력 사건 및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회지도자층을 비롯, 고위 공직자들의 성 접대 파문만 해도 그렇다. 인간의 성(性)은 삶의 원동력이다. 아울러 인생의 아름다운 꽃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이 사회 고위층 성 접대 파문으로 음풍(淫風)에 젖은 적이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이런 성 추문이 불거질 때마다 상대 여자는 항상 약자 입장이다. 고위직에 올라 아쉬울 게 없는 공직자들이 일탈을 할 땐 항상 미모를 지닌 젊은 여성이 함께 있다. 왜? 여자는 늘 남성들 성 노리개가 되어야 할까? 너무 억울하다. 여자도 남성들을 성적 유희의 상대로 삼을 수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런 일은 여자에게는 생각하는 그 자체로 죄가 된다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 아닌가. 모순이긴 하나, 필자도 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듯 아직도 봉건적 폐습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면 지나칠까. 가슴을 아프게 하는 유행가가 있다.'여자이니까'라는 제목의 유행가가 그것이다. 참으로 애달픈 생각이 들어 가창 대신 가사를 낭송을 해본다. 사랑한다 말할까 좋아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말 못해 나는 여자이니까/ 만나자고 말할까 조용한 찻집에서/ 아니야 아니야 난 싫어 나는 여자이니까/ 사랑한단 말 대신에 웃음을 보냈는데 음음음/ 모르는 체 하는 당신 미워 정말 미워 음음음/ 싫어한단 말할까 미워한다 말할까/ 아니야 아니야 말못해 당신 사랑하니까/--생략-아직도 여자는 다소곳하고 조신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매사 적극적이면 여자로서 강해 보여 억센 여자로 비치기 십상이다. 여자는 감정을 드러낼 때도 조심스러워야 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도 보고 싶다고 먼저 말하면 여자답지 못한 언행으로 비친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사랑도 여자가 먼저 고백하면 흉이 됐던 시대는 지난지 오래다.   사회 각계각층에 여풍이 드세게 불어오는 세상이다. 이젠 여자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며 살아야 하는 자의식을 정립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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