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야 한자어로 된 행정 편의상의 주소지명을 쓰는 것이 예사스럽지만 반세기쯤 전만 하더라도 순우리말로 된 마을 이름이 적지 않았습니다. 감나무가 많은 마을은 감나무골, 볕바른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은 양지마, 마을이 들어선 곳이 우묵하니 들어간 터라면 가마골 하는 식으로 부르던 이름이 아직 남아 있는 곳도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감포로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범곡리라는 마을 표지판이 있습니다. 도로에서도 산길을 따라 한참 걸어 들어가 토함산 동쪽 사면에 자리한 거기는 이름으로 미루어 보아 산이 높고 골이 깊어서 지금은 자취도 없는 호랑이가 옛날에는 많이 출몰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아마 마을 이름도 범골로 불리다가 지금 범곡리라는 행정명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강원도에는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습니다. 행정지명으로는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로 쓰입니다. 백두대간 등줄기인 강원도는 산이 많기도 하려니와 산세도 험해서 산골짝에 생긴 마을들은 외부로부터의 접근성이 어려워서 이런 이름이 생겼나 봅니다.    지역 사투리로 ‘안돌이(안고 돌고) 지돌이(지고 돌고) 다래미(다람쥐) 한숨 바우(한숨 바위)’ 마을은 좁은 산길 곳곳에 험한 바위가 많아서 ‘두 팔을 벌려 바위를 안고도 돌고 등지고도 돌며 다람쥐도 한숨을 쉬며 넘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라니, 이름에서 이미 험하고 좁은 산길을 숨차게 돌고 돌아야 비로소 닿게 될 마을의 모습이 선연히 그려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 갑자기 ‘안돌이지돌이다래미한숨바우’라는 이 말이 내 머릿속에 들어 떠나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나날이 마치 다람쥐도 한숨 쉬고 이리저리 돌아가야 할 정도로 힘든 바위길처럼 숨이 차서 그럴까요? 부쩍 삶이 고단하고 어지러워져서 굽이굽이 인생길을 돌아가는 게 힘이 든다고들 주변 사람들이 내쉬는 한숨이 남의 것 같지 않아서일지도 모르지요.   경제가 어려워지니 살림살이도 따라 강퍅한 데다 민생은 뒷전으로 던져두고 서로들 권력을 쥐려고 다투느라 염불보다 잿밥만 챙기려는 TV 속 정치인들 모습이 우리를 참 답답하게 합니다.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며 교수신문이 뽑은 2024년의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권력이나 세력을 제멋대로 부리며 함부로 날뛰다)’와 ‘후안무치(厚顔無恥:낯짝이 두꺼워 부끄러움을 모르다)’의 해로 요약하더군요.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는 엘리트 집단이 공고한 세력을 이루고, 인간관이나 사회관이 자신의 이익에 매몰되어 부끄러움과 염치도 알지 못하는 지도자들을 바라보는 국민이 오히려 더 부끄러워지던 해로 기억되겠지요.   그다지 길지도 않은 내 생애에서 기억나는 비상계엄령만 서너 번을 겪자니, 이번의 경우는 발령한 지 몇 시간 만에 해제되기는 했지만 과거 계엄령 아래의 조마조마하던 불안감이 PTSD처럼 떠오릅니다.    끝나지 않는 러‧우 전쟁, 내란으로 국민을 버리고 남의 나라로 도주한 중동의 어느 나라 독재자, 남의 나라 전쟁에 총알받이 용병이 된 북한의 군인들과 같은 국제 정세도 숨가쁘지만, ㅇㅇ도사니 퇴역 군인이 간여한 점집이니 하는 비이성적 정치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우리 정치의 지도자들의 면면에 내년을 위한 비나리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깨끗한 물 한 사발을 정하게 떠 놓고 비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용의 해가 지면 을사년 푸른 뱀의 해가 뜹니다. 우리 역사에서 을사년은 을사사화(乙巳士禍)나 을사늑약(乙巳勒約)과 같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사실 푸른 뱀은 농경사회였던 전통 민속에서는 풍요와 재산을 지켜주는 지킴이로 믿었습니다.    옛이야기에서 초가지붕 속에 틀어 있던 집지킴이 구렁이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슬며시 나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 집은 망조가 든다거나, 반대로 그 수호신이 옮겨 지붕 속에 자리잡는 집은 재산이 불 일 듯 일어 흥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을 흔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해에 푸른 뱀이 온다는 것은 집지킴이가 돌아오는 것이라 여기렵니다. 마음속에 정한 물 한 그릇 마련하고 새해에는 정치가 바른 길을 찾아가고 경제도 불 일 듯이 흥하기를 두 손 비비며 소망해보렵니다. 어느 외국 시인이 봄을 ‘푸른 뱀이 땅 속에서 눈뜨는 소리’라는 이미지로 표현했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아직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살갗을 에지만 새해가 오면 땅 속 깊은 곳에서 눈뜬 푸른 뱀이 봄처럼 다시 일어서는 기운을 품은 지킴이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와 주리라 믿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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