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1597(선조 30), 경주부에 남아있던 관사와 신라 때 창건한 분황사에 30만 근의 주물로 만든 금불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9층 고탑’도 또한 모두 무너지고 부서졌다(출처, ‘경주선생안’)’.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1962년 국보 지정)이 9층이었다는 정확한 기록이 밝혀져 ‘9층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9층이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왜병들에 의해 파괴됐으니 16세기까지는 9층의 면모였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경주문화논총 제27집(경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2024)’에서 최민희 전 진흥문화유산연구원 전시관장(향토문화연구소 위원)이 쓴 논문 ‘경주에서의 석조문화유산 재활용과 경주읍성 복원’에서 밝혀졌다.
최민희 위원은 경주 분지 내 문화유산 훼손 현황 중, 경주 분지 동편 절터 분황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돼 지금은 3층으로 남은 모전석탑과 보광전, 화쟁국사비부, 삼룡변어정으로 일컬어지는 팔각형 우물이 현존하며 많은 주춧돌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라고 전제했다.그러면서 “3층으로 남은 모전석탑은 원래 9층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 왜병들이 파괴해 지금은 3층으로 남았고, 일제강점기에 해체 수리하면서 2층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온 것이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2층에 전시되고 있다”고 했다.이 탑과 관련해 9층이었다는 내용의 출처는 ‘경주선생안’에 근거한다. ‘정유년 1597(선조 30) 9월에 청정(淸定) 등 변방에 웅거한 적들이 다시 준동해 육량(陸梁)으로 전라도·충청도 등을 종횡하고 직산에 이르렀다가 경상좌도를 따라 내려올 때 참살과 노략질한 것은 처음보다 훨씬 심했다. 경주부에 남아있던 관사와 신라 때 창건한 분황사에 30만 근의 주물로 만든 금불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9층 고탑'도 또한 모두 무너지고 부서졌다. 경주에 주둔한 5일 만에 적들은 울산으로 내려가 도산(島山)에서 성을 구축하여 굳게 지키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이 기록은 분황사 동쪽 담장 바깥에 옮겨 쌓아둔 분황사 모전석탑의 남은 탑재들을 통해 석탑이 3층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같이 구체적 사실을 명기하고 있는 ‘경주선생안(慶州先生案)’은 고려중기 이래 경상도와 경주에 부임한 역대관료 및 향리 계층에 대한 기록인 ‘선생안(先生案)’ 5종으로 고려 문종 32년(1078) 이후 경상도를 다스린 중앙 관료에 대한 성명과 부임 및 이임 연월일 등을 기록하고 있는 도선생안(道先生案)과 부선생안(府先生案) 등이 포함돼 있다.경주지역 지방사는 물론 고려와 조선왕조의 지방통치 실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인 이들 5종 선생안은 조철제 전 경주문화원장이 ‘국역 경주선생안(2003)’이라는 제목으로 완역한 바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