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촌리 바람꽃이 들판을 채 덮는다. 노을지는 해거름에 보니 바람꽃이 피었다. 쌀뜨물처럼 뿌옇게 피는 먼지바람 속에서 얄팍한 이파리가 갓 세수한 얼굴처럼 해맑다. 흙 묻은 채로 떠 온 바람꽃에 고향을 떠나 온 설움이 비쳤다. 닿기만 해도 하늘하늘 생채기가 날 것 같은데 바람꽃이 새긴 선율이 잿빛 하늘 가득히 떠오른다. 바람의 손끝에서 피는 바람꽃. 뿌리를 박는 곳은 바람모지 언덕이지만 꽃조차도 바람의 우듬지에서 핀다. 예쁘게 핀 다음 꽃내음도 바람에 업혀서 간다. 어딘지 모르지만 그 씨앗도 바람에 날려서 새로운 꿈을 틔우는 게 바람꽃의 운명이다. 무심코 바라보는 나도, 바람꽃도 하고많은 사연을 품은 채 여기까지 흘러왔거늘. 바람에 시달리는 날이 있다. 음악을 들어도 찌뿌드드하고 그런 기분으로는 나가봐야 괜히 언짢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워드작업을 쉬지는 않는데 바람꽃 피는 날은 패닉 상태가 된다. 잠을 설치면 그 다음 날 일상이 삐걱거린다고 하는데 나는 바람꽃 피는 날이 그랬다.    꽃바람꽃 바람꽃, 흙먼지가 낀 하늘을 보면 짜증스러웠다. 꽃가루와 황사까지 겹치면 쪽빛 하늘은 보기 힘들지만 한바탕 치른 뒤에는 거짓말처럼 컨디션이 좋아진다. 그 때문일까. 힘들어하면서도 병적으로 좋아하는 취향이 스스로도 당혹스럽다. 어린 싹을 캐오던 날도 바람이 장난 아니었다. 바람이 일필휘지한 봄 언덕에는 먼지가 그득했었지. 하도 고와서 무심코 후벼 팠으나 잘 키우게 될지 걱정이 태산 같다. 다행히 뿌리를 박으면서 해마다 꽃을 피웠다. 억지로 데려 온 게 미안할 정도로. 큰 바람이 불 즈음 에워싸는 칙칙한 느낌이라더니, 버석버석 소리가 밟힐 정도로 시끄럽던 바람꽃 서슬. 한 이틀 몰아치던 보리누름 서리가 회리바람체로 문자를 보냈나? 하필 바람꽃이었을까. 2월의 문턱에서 얼음을 깨고 피는 변산바람꽃도 있다. 봄인데도 절반은 바람이듯 우리 또한 살면서 바람이었으나 바람꽃이라고 부르면서 끌어안는다. 꽃 좀 피려니 바람까지 심술 놓는다면서. 누군가 심심파적으로 이름 지었을 거다. 일을 해도 재미가 없고 지게목발 두드려도 신명이 나지 않는 그런 날이었으리. 마루 끝에 앉아 있는데 하늘 가득 바람꽃이 피었을까. 먼 산자락에 바람꽃이 필 때는 태풍이 올 것도 감지하면서 특별한 이름이 생각난 거야. 딱히 일기예보가 아니어도 지금 보는 바람꽃 또한 봄장마 드는 4월에 모람모람 피어났으니. 바람을 껴안는 출처가 궁금하다. 벚꽃이니 살구꽃이 지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피는 바람꽃. 특별히 그 많은 바람꽃은 미나리아재비 과의 여러해살이풀이었다. 소박한 시골사람들이 식물학적 용어를 알 리는 없고 크는 모습과 꽃 피는 모양새가 비슷한 데서 무슨무슨 바람꽃이라고 작정했으리. 사람살이도 속내는 다를 게 없다면서 위로하고 견딘 성 싶은데……. 바람꽃을 보면 슬픔이 지나갔다. 외로움이라고 해도 괜찮을 거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그리움으로 떠돌다가 바람이 둥지 트는 어디쯤 내려앉으면 그리운 이의 가슴에도 훈장처럼 빛난다. 바람모지 언덕으로 이사 온 지 몇몇 해, 응어리진 바람꽃 가슴마다 고스란히 전해졌던 것. 그러면 그렇지, 꽃 피기 전의 바람꽃은 계속 바람이었으나 운명으로 생각하는 꽃이라면 질 때도 여전히 바람을 안고 살 테니. 바람이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바람꽃의 고향은 바람모지 언덕이라고. 바람의 딸로 태어났으나 아무리 바람 불어도 그 자리에서 참고 견디는 꽃이다. 도톰해진 꽃망울에는 바람이 잔뜩 틀었다. 꽃 피기 전이라 그럴 수밖에 없지만 어느 날 바람에 간신히 피었어도 여전히 바람을 끌어안은 채였다. 바람꽃의 운명은 이름 그대로 바람이었던 것을. 무심코 바라보니 보련산 꼭대기에 또 다시 번져가는 바람꽃. 바람이 없으면 꽃도 피지 않고 향기도 무심하다. 5월이면 홀아비바람꽃에 하늘바람꽃도 필 테니 구름처럼 끼는 바람꽃도 나쁘지는 않다. 그렇게 시달리고도 바람꽃은 좋으니 어쩌랴. 바람부는 날은 썰렁한 느낌에 스카프를 두 겹 세 겹 여민다. 바람꽃 바람꽃, 나와는 상극인 날씨를 극복하는 방법을 고민해 봤지만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된 것일까. 먼지로 뒤덮인 하늘은 우중충했지만 그런 날 핀 바람꽃 때문에 기분전환이라면? 바람꽃 나라에서 온 편지를 보면 그렇게 적혀 있었다. 천 길 절벽 낙락장송이 구천에 뿌리박는 것도 바람을 물리치는 방법이라고. 칙칙했던 하늘이 파랗게 열리고 풀들이 제 몸을 눕히면서 일어날 힘을 키우는 것도 바람꽃 서정이다. 재넘이가 몰아치는 날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갈대밭 풍경도 바람꽃 사랑이다. 인생 또한 운명의 바람이 아니면 무의미하게 끝난다. 푸른 하늘을 만드는 것도 태풍이었으니까. 태풍을 일구자니 또 바람꽃이 피어야 하고 우리도 그에 맞는 곡절을 치러야 했다.    종일 찌푸리다가도 이튿날이면 파란 하늘 때문에 이름조차 고운 바람꽃으로 태어난 것처럼. 우리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바람모지에서 쓰러질 때다. 꽃 중에 특별히 바람꽃을 감상한 것도 잿빛 하늘 때문이었다. 꽃가지에는 초록별 사연도 적혀 있었다. 바람꽃 언덕에 올라가면 그리운 목소리 담은 메아리까지 달려왔다. 바람이 빠져나간 들판은 죽은 공간처럼 썰렁했지만 잿빛 풍경은 촉촉해진다.    옥토의 전신은 황무지라고 하듯. 바람꽃 원산지가 바람이 둥지 트는 곳이었다면 바람의 고향도 바람꽃 피는 언덕이었을 테니. 바람꽃 자체가 큰바람의 징후였지만 떨어지고 나면 산새들까지 5월을 수놓는다.    그래서 이름도 예쁜 바람꽃이었는지 모르겠다. 바람 부는 날의 페이지를 열면 그렇게 적혀 있었다. 바람이 아니면 하늘은 푸르러질 리 없다고. 우중충한 바람꽃 여울이지만 그래서 훨씬 더 화사하게 필 바람꽃처럼 그렇게 살 것을 꿈꾸는 것이다. 바람조차 꽃으로 피는 윤4월 어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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