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 나는 꽃도 그리고 나물도 그리고 오만 가지 주변에 있는 것, 풀 이파리들 주워서 그리지요”   초고령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나이 들고 늙어 갈 것인가. 그 의문에 ‘낭만 꽃 할매’ 오진(91) 할머니가 이름 없는 들꽃 같은 미소로 해답을 전한다.   미국의 국민 여류 화가 모지스(Grandma Moses,1860~1961)는 76세부터 회화에 전념해 80세에 개인전을 열고 100세에 세계적인 여류 화가로 명성을 높였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는 모지스 할머니처럼 경주시 절골길(황용골)의 깊은 산골 마을에 살면서 주변의 꽃과 동식물을 소재로 삼아 그림 삼매경에 들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는 오진 할머니는 작고 소박한 들꽃을 닮았다.   지난 25일 찾은 할머니의 작은 방에는 스케치북과 색연필, 크레용이 가지런히 갖춰져 있어 ‘꽃 그림 할매’라는 소문을 실감나게 했다. 동글동글한 인상의 할머니는 인터뷰 당일 빨간 보자기에 봄꽃과 들풀을 잔뜩 끊어다 펼쳐놓고 예의 그렇듯,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친정이 경주읍 외동이라는 할머니는 19세 때(당시 남편 23세) 결혼해 1년 후 시가(媤家)인 이곳 황용골로 들어와 70여 년간 지금까지 살고 있다. 종부였던 그는 슬하에 3남 4녀 7남매를 두고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절친하게 지내는 이웃 할머니들도 아흔을 넘기거나 일흔을 훌쩍 넘긴 친구들인데 그들 모두 할머니의 그림 그리는 일을 반긴다고 한다.   “밭도 많이 붙이고 논도 많이 붙였지. 소도 먹이면서 여자, 남자 가리지 않고 일했어요. 콩, 감자, 고구마, 보리 농사를 지어 포대에 이고 저 동구 밖 휴게소까지 그 짐을 이고 걸어 다녔어. 높은 고개에서도 쉬면 못 일어나니까 쉬지도 못하고 걸어야 했어”   특히 감나무가 많아 감을 삭혀서 토함산 재까지 걸어 넘어가 불국장에 내다 팔곤 했다는 오 할머니는 최근 10여 년 전까지는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10여 년 전 작고해 최근엔 홀로 있는 노모와 함께 지내기 위해 이곳에 온, 울산에 직장을 두고 있는 둘째 아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한평생을 종부로 이 절골에 살면서 시부모 모시고 아이들 키우며 고된 농사일 할 때가 제일 힘들었지. 집안일 만해도 말을 다 못해요. 평생을 시집 살았거든” 지난했던 삶을 억척스레 살아온 할머니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그림은 3~4년 전 ‘구리양(크레용) 동가리’들을 주어다가 공책이나 종이, 달력 뒤에 그렸어. 그랬더니 손부, 며느리, 아들이 치매 예방에 좋다면서 물감과 공책, 스케치북을 사다 줘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그려요”   자손들은 이외에도 그림 교본 등을 구해주는 등 할머니의 취미를 존중하고 응원해준다고 한다. 특히 외손주, 손부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료와 그림책을 보내준다.   “낮에는 마을회관에서 놀다가 저녁 먹고 밤이 늦도록 새벽까지도 그리는데 그렇게나 재미가 있어요. 내 손 가는 대로, 마음대로 그려요”   최근엔 자녀들 이외에 생활지원사 김정희 씨가 적극 관심을 가지고 스케치북을 구해주는 등 지지해줘 더욱 힘이 난다고 한다. 오 할머니는 처음엔 그림 교본을 참고해 직접 심어 키우는 꽃, 들에 있는 꽃, 동물들을 보고 그리다가 지금은 생각나는 대로 상상해서 그린 작품들이 많다. 자손들이 사진 찍어 보내준 것도 참고해 그린다고.   할머니 그림의 소재는 주로 주변에서 보고 만날 수 있는 꽃, 나무, 산나물, 이름 없는 들풀, 강아지, 고양이, 새, 나비, 벌...,등을 색연필이나 크레용으로 그린다. 그런데 화투짝들도 정교하게 그렸다. 팝아트적이어서 현대 미술로도 손색없어 보인다.    인물도 자주 그리는데 굳이 대상을 정하지 않는다. “인물이 잘 안되더라구”라고 하는 할머니의 너스레와는 달리 매우 독창적 이미지의 얼굴을 그려두었다. 얼핏 바스키아 같기도, 그래픽적이기도 하다. 배워서 그린 그림이 아니어서 그런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림을 그리니 밤새 그려도 심심풀이로 기분이 좋아요. 시간도 빨리 가고. 다만 안질이 나빠 눈이 좀 피곤하지만...,”   ‘산중이라도 제법 부촌’이라는 이 마을에 살아서 참 좋다는 할머니는 요즘은 봄이라 산과 들에 그릴 것이 너무 많아서 더욱 행복하다고 한다. ‘학교 문 앞도 못 가봤다’는 할머니는 꽃 이름과 채소, 동물 이름도 빼뚤빼뚤하지만 정갈하게 기록해뒀다. “잔손질을 많이 해요. 스케치북 한 장을 가득 메우려면 몇 시간이 걸리지요”   할머니는 달력 뒷면을 활용한 그림책을 실로 엮어 손수 만들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린 스케치북만해도 20여 권으로, 한 장 한 장마다 빼곡하게 그렸다. 집중해서 세심하게 그리는 모습은 여느 작가 못지않게 진지하다. 오히려 그 순수하게 몰입하는 모습에 숙연해질 정도다.    이런 할머니에게 자손들은 할머니만을 위한 ‘그림 전시관’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오 할머니는 “내가 할 수 있는 시간까지는 그릴 거예요. 앞으로는 지금까지 그렸던 소재 말고 다른 소재들도 그려보고 싶어요”라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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