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강자의 횡포를 제지하는 공권력을 자유 탄압이라 할 수 있는가? 모든 구성원에게 균등한 기회 부여를 위해 반칙하는 자들에 대해 행해지는 공권력 집행을 민생 탄압이라 할 수 있는가? 독점적 지위를 획득한 거대 공룡기업의 무한 확장 억제를 기업 탄압이라 할 수 있는가?
진실은 덮고, 거짓과 허위사실을 보도하는 언론기관을 향해 행해지는 공권력 사용을 언론 탄압이라 할 수 있는가? 선량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삿된 교리로 세뇌시켜 금품을 갈취하거나, 사회 질서에 반하는 종교집회 등을 행하는 자들에 대해 행해지는 공권력을 종교 탄압이라 할 수 있는가? 우주 만물이 중력(重力)과 핵력(核力), 그리고 전자기력(電磁氣力)에 의해 통제되고 운행되듯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법과 윤리에 의해 통제되고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탄압과 통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게 문제로 보이는데, 통제를 탄압이라 해서도 안 될 것이지만, 탄압을 통제라 하면 되겠는가? 그 얘기다.여기서 탄압과 통제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나는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운전자가 도로를 주행하다 과속단속에 걸려 범칙금 통지서가 날아 왔다면, 그것을 탄압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차선을 잘 지키고 정속 주행으로 목표지점에 도착했음에도, 경찰이 갑자기 나타나 운전면허 제시를 요구하며, 당신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교통법규 위반을 했을 개연성이 충분하니, 위규(違規)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하라 하면 그것을 법과 원칙에 따른 통제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와 같이 탄압과 통제의 구분이란, 보편타당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 수긍할 수 있으면 통제가 되겠지만, 억울하면 탄압인데 무슨 논쟁이 또 필요한가라는 얘기다. 원칙은 원래 그대로 있기에 당연히 지켜져야 할 규칙이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이며, 가장 보편타당하여 누구에게나 상존하는 지식을 또한 상식(常識)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원칙을 누가 세울 수 있으며, 상식은 또 누가 정의한다는 말인가? 원칙이나 상식은 주장하는 사람의 주관이나 의지에 있지 아니하고, 언변이나 권력으로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질량이 모이면 중력이 발생되고, 전류가 흐르면 자계가 형성되듯이, 원칙과 상식은 원래 그대로의 법칙이며 누구나의 지식일 뿐인데, 특히 원칙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 원칙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보기 드물고, 상식을 강조하는 사람 중에 상식적인 사람 찾기가 힘든 것은 무슨 일일까?내가 말 하는데, 탄압과 통제를 구분하지 못할 바보는 없으니, 탄압하더라도 탄압을 통제라 하지는 말 것이며, 통제를 탄압이라 하지도 말라는 얘기다. 인간이 다 옳고 바른 일만 하면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쁜 일을 하면서 좋은 일을 한다는 주장만큼 미운 일도 없을 것이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변(便)을 더러워하면서 변을 좋아할 수 없듯이, 죄를 지으며 죄를 모르는 사람을 관용할 아량(雅量)이 나에게는 없다. 전 세계인이 알듯이 우리는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혹은 무슨 일을 저지르려 했는지 똑똑히 지켜보지 않았는가? 독일인들은 지금까지도 합법적으로 선출된 희대의 광인 ‘히틀러’의 과오를 잊지 않기 위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하일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손동작(팔을 번쩍 드는 동작)을 금지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다시 그 역사를 겪게 될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상징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벽에 새겨진 글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지금 기억해야 할 역사는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역사 교육을 시켜왔는지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