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6·25전쟁 발발 75주년을 맞은 지금, 대한민국은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그 뒤편에는 여전히 조명받지 못한 전쟁의 유산이 존재한다. 바로 이름 없이 살아온 ‘전쟁고아’들이다. 울릉도에 거주하는 진철(75) 씨는 그중 한 명이다.진철 씨는 6·25전쟁 당시 부모를 잃고 홀로 떠돌아야 했던 수많은 아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전쟁 직후 전남 목포의 ‘가마원’이라는 고아원에 수용됐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은 이름이나 성 없이 단순한 ‘숫자’로 불렸다. “이름도, 성도 없이 살았습니다. 보호 대상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었죠.” 그는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차가운 바다를 헤엄쳐 육지로 탈출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자유가 아니라 또 다른 생존의 전쟁이었다. 진철 씨는 거리에서 구두를 닦고, 신문과 우산을 팔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때론 굶주렸고, 노숙 생활도 이어졌다. 고아라는 신분은 늘 따라다녔고, 사회는 그들을 ‘불쌍한 아이’가 아닌 ‘불량아’로 취급했다.“정부의 보호도, 사람들의 연대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냥 혼자 살아남아야 했어요.” 결국 그는 한 하숙집에 머물며 주인의 딸과 가정을 꾸렸고, 두 명의 자녀를 키우며 스스로 삶을 일궈냈다. 그러나 사회의 편견과 낙인은 끝내 그를 자유롭게 두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 공식적으로 약 10만 명 이상의 전쟁 고아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대부분 고아원에 보내지거나 거리로 내몰렸고, 수만 명이 미국과 유럽 등으로 해외 입양되었다. 입양 과정에서 신분이 조작되거나 강제로 입양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국가보훈의 틀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국가유공자도, 전몰군경의 유자녀도, 독립유공자의 후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채 살아온 그들은 지금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전쟁의 피해자였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우리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전쟁고아 출신 대부분은 이제 70대 후반의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는 이들에 대한 별도의 지원 정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일부는 비공식적인 모임을 구성했지만, 낙인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부분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전쟁이 만든 세대입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진철 씨는 말을 이어갔다. “이제라도 우리 같은 전쟁고아들이 존재했음을, 그리고 아직도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해 줬으면 합니다. 단지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역사 속 존재로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전쟁고아 문제는 더 이상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전 세계의 분쟁 지역에서는 또 다른 진철 씨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전쟁의 고아들은 경고한다. 전쟁의 피해는 총성이 멈춘 뒤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을. 대한민국은 이제 그들의 희생과 고통을 기억하고, 제도적 장치로 응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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