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향내(鄕內)에는 숭덕전. 숭신전, 숭혜전, 흥무전, 육부전을 비롯하여 475개소의 유교문화유적이 있다. 이 가운데 서원은 서악∙옥산∙용산∙단구∙동강∙운곡∙구강∙장산서원과 석년(昔年)에 경주 유림의 공의에 의해 서원으로 승격된 북산서원 등 11개소가 있고, 정자와 서당이 180개소, 재사는 113개소가 있다.
  이들의 대부분이 해마다 3, 4월에 춘 향대제 및 향사를 봉행해오고 있다. 배향되는 선현은 모두가 지난 시대에 나라를 통치하며 선정을 베풀었거나 국란에 목숨을 바친 충신과 과거에 급제하여 직무를 잘 수행하여 세인의 귀감이 되는 고급관료들이다. 그래서 사림의 공의에 의해 서원과 사당을 긍구하여 향유들이 향례를 봉행하며, 그 덕의를 숭앙해오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11일(음력)에 도장서당 향례에 초헌관으로 천망되어 참예하여 보니, 이 서당은 이시애란에 선봉장의 명을 받고 종군하여 순절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쌍청당 강렬공 차운혁의 사당이 있는 서당이었다.
차운혁(1393~1467)은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였던 숙부 차원부가 하륜 등에 의해 살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길주, 회령 등지를 전전하며 유배 생활을 하다가 세종 때 차원부의 신원이 회복되자 차운혁도 유배에서 풀려나 어모장군 겸 사복시정에 임명되었다. 
 
단종이 승하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도봉산에 은거하던 중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 등이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선봉대장이 되어 도사 김귀일, 이준의 종사관 김관, 안동부사 손소 등과 토벌에 나섰다. 이때 차운혁은 75세 석로(碩老)의 연치였고 김귀일은 48세, 김관은 43세, 손소는 35세였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여 경관으로 대체하고, 수령들에게 지방 유지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서 유향소는 불평과 불만이 극심하였다. 
 
이런 시기에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喪)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이시합,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음모하고 1467년(세조 13) 5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함길도의 절도사가 진장(鎭將)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등을 죽이고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 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였다. 그래서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반란군은 평안도까지 세력이 확장되어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세조는 귀성군 준(浚)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3만 관군은 이원의 만령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때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자기 부친이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운로 등을 설득하여 이들과 함께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8월 이시애 등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차운혁은 함경도 이성에서 그 무리인 이시애의 동생 이시합과 이시백을 사로잡아 큰 전공을 세웠는데, 마운령에 이르러 유감스럽게도 부장인 최윤손이 반역하여 이시애 일당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래서 차운혁과 정휴명 등은 이시애에게 잡혔고 단천에서 억울하게 순절하였다. 종군의 명을 받은 김귀일은 마운령 격전지에서 풀로 위장하고 산을 등지며 뛰어난 전략으로 삼전 삼승을 하였다.
차운혁은 1469년(예종 1) 적개공신 2등으로 책훈(策勳)되었고, 1860년(철종 11)에는 충절을 기리는 정려(旌閭)가 조정에서 내려졌다.
  충암공 김귀일은 2등 공으로 가선대부 행밀양도호부사에 제수되었고 사후에 관리를 파견하여 치상하였으며, 자헌대부병조판서 증직과 사패지로 요광원 사방십리와 상여가 하사되었다. 
 
김관은 적개공신 2등의 녹훈과 언양군에 봉군되었으며 전주부윤과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양민공 손소 역시 적개공신 2등에 녹훈되고 안동부사, 진주목사를 역임하였다.
  특히 차운혁은 75세 석로(碩老)의 연치에 종군(從軍)의 부름을 받고 토벌군에 기꺼이 참전한 충의는 가볍게 생각할 수 없은 절의(節義)였으며, 임진란 때 59세 퇴역 무관인 월암공 김호장군이 솔선 창의하여 순절한 충의와 병자호란 때 정무공 최진립장군이 69세로 참전하여 순절한 보국충의는 모두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었기에 모두가 거룩한 충절이 아닐 수 없다.
  깨끗하게 유지 관리되고 있는 도장곡 연안차씨 문중의 도장서당은 쌍청당 강렬공의 보국순절 대의에서 볼 때 서원으로 승격하여 향화를 올려 숭앙(崇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