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살고 봐야 한다”는 말은 절박하다. 삶 끝자락에서 뱉어낸 한숨 같기도 하고, 폭풍우 속에서 자신에게 거는 주문 같기도 하다. 철학에 대한 사유보다 실존에 가까운 이 문장을 보면 볼수록 삶과 존재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살기 위해 무엇까지 감내할 수 있는가? 인간 존엄과 가치, 의미와 목적은 언제부터 곁딸린 것이 되었는가?
현대 사회는 생존에 대한 기준을 끊임없이 바꾸어 왔다. 전쟁 중에는 총알을 피하는 것이, 산업화 시기에는 굶지 않고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팬데믹 시대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것이 생존에 대한 조건이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고 물질이 넘쳐나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살고 봐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견딘다. 생존은 단지 육체를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유지하며 살아남는 문제로 확장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 조건을 노동, 작업, 행위로 나누었다. 이 중 ‘노동’이 가장 기초가 된다고 규정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행위이며, 동물인 인간-‘동물적 존재’(animal laborans)-을 드러낸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생물학 존재가 아니다. 의미를 만들고, 관계를 맺고, 역사를 만들며 살아간다. 하지만 밥벌이를 위한 노동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고귀한 내면세계와 멀어졌다. “살고 봐야 한다”는 말은 때때로, 우리를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인내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살아남기 위함에 대해 사르트르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어떤 목적이나 가치로 규정되기 전에, 먼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는 선언이다. 살아 있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존재 그 자체가 가장 근원적인 자유 조건이 되는 셈이다. 기적처럼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지 시간 흐름 속에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말이 밥벌이가 현실로 드러나면, 복잡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가치들을 포기해야 할 때, 우리는 ‘존재에 대한 자유’를 누린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생존할 수 있는 길은 과연 존재하는가?
도스토옙스키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 했다. 인간에게 빵이 필요하다. 그러나 빵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사랑과 존중 그리고 의미가 필요하다. 생존 문제는 단순히 ‘죽지 않음’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 문제로 이어진다. “사람이 살고 봐야 한다”는 말은 때때로 고귀한 가치들 위에 올라선다. 그러나 모든 가치를 유보하고, 인간성을 포기하며 살아남는 삶이 과연 의미 있는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생존은 인간 존재에 대한 최소한 조건이지만, 의미는 그 존재를 지탱하는 본질이다. 살아 있기에 질문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기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때로는 견뎌야 하고, 포기해야 하며, 싸워야 한다. 그 모든 선택은 결국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답게 살기 위해서’이다.
결국 “먼저 살고 봐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 인간 본능이자 진실이다. 그러나 그 진실은 출발선에서만 유효하다. 그 너머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간은 단지 살아 있는 육체에 불과하다. 삶은 생존을 넘어 의미를 찾는 여정이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만으로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숨을 쉬며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묻는 순간이 필요하다. 어떻게 살 것인가.